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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내 맘대로 읽기45

종이 컵 종이 컵 나는 길가에 버려졌다 아직 내 몸엔 그대의 손자국이 선명하다 립스틱 자국 또한 붉다 격렬했던 한때 나는 온전했고, 티끌 없이 순결했다 하지만 나는 구겨진 채 버려졌다 2020. 10. 5.
빵구 씨의 자유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빵구 씨를 만났다. 빵구 씨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고 곧 달려갈 자세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딘가를 바라보며 팔 하나는 이미 발 보다 앞으로 나가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쪽 팔이 줄에 묶여 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디 가시려구요?" 나는 빵구 씨에게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몇 사람이 빵구 씨 앞을 지나며 킬킬거렸다. "빵구똥구네!" 분명 이름이 빵구 씬데 빵구똥구라니.... 남의 이름을 함부로 바꿔서 불러도 되나?... 그것도 유희적 대상으로 삼아 킬킬대다니 정말 예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나는 빵구 씨 앞에 섰다. "한 쪽 팔은 왜 묶인 거예요?" 빵구 씨는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질 것 같.. 2020. 10. 2.
[그림]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作 키스* 당신이 뚫고 나온 벽을 타고 황금빛 저녁놀이 흘러 내리고 있어요 당신은 내 목을 끌어안고 빰에 깊게 키스하지만 봐요, 내 발이 꽃밭 끝에 겨우 걸처져 있음을 꽃밭 아래는 온통 낭떠러지, 순하게 무릎 꺾어 당신께 드렸는데 이제 곧 밤이 닥칠 거예요 내 둥근 발꿈치가 어둠에 삼켜지고 내 입술은 점점 지워질 거예요 당신이 몰고온 꽃들도 시들어가고 있어요 저녁놀을 타고 온 반짝이는 별같이 당신이 나를 휘감았을 때 나는 발명되었어요 당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거에요 시든 꽃들과 몇 몇의 별만 반짝이기 전에 어서 내게 키스해줘요 우주 한가운데 느닷없이 솟아오른 꽃나무같이 화들짝, 생을 밝히고 싶어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2020. 9. 29.
마그리트의 <보상받은 시인>그림 읽기 그림을 보면서 무릎을 딱 쳤다. 그림에 기가막히게 떨어지는 문장이 생각났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마음속에 꽃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 법륜 스님의 말씀이다.의 마음속에 붉은 노을이 가득 들어 있다.본다는 것은 관심이 없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는 법,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이미 내 마음속에 꽃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소리다.나는 이러한 문장을 좋아한다.구구절절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보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면 충분한.이러한 문장은 통찰 없이는 쓸 수 없다. 행복하다...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도 이 그림에 맞는 문장을 만난 것도... 2020. 9. 25.
흰여울마을 묘박지 묘박지 영도 흰여울마을 앞바다에배들이 허리띠를 풀고 누웠다 멀리 남항대교를 바라보며 밤이면 바람에 쓸려온 별을 덮고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에 몸을 적신다 2020. 9. 18.
비상구 비상구 초록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이 울울창창 여름은 너무 빽빽하다 매미소리도 햇살도 틈이 없는, 그만, 가을로 빠져나가야겠다 2020. 9. 12.
일요일 오후, 하이쿠를 읽다 이 시집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자마자 샀다. 출판사에서 푼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완전 새책이었다. 그것을 반값에 샀으니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하이쿠에 대해서는 바쇼 정도만 알고 있던 터라 이 시집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제본상태, 편집, 류시화 시인의 해설, 중간 중간 들어 있는 그림 등 탄성이 나올 만큼 마음에 들었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바쇼 목욕한 물을 버릴 곳 없네 온통 풀벌레 소리 -오니쓰라 하이쿠의 매력은 짧지만 그림을 보듯 이미지가 선명하거나 의미의 확장성이 크다는 점이다. 7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맛있는 치즈 케이크를 아주 조금씩 떼어 눈을 감고 음미하듯 그렇게 읽고 있다. 바쇼의 하이쿠와 오니쓰라의 하이쿠는 여름.. 2020. 8. 23.
르네 마그리트의 <현재>를 읽다 그림 그리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시적인 것이다 라고 했다. 시적인 제목은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들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화가라는 이름보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는데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곤 한다. 즉 감상자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퍼즐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다. 무수한 이미지와 상징은 우리에게 건너오면서 제대로 전달되기도 하지만 의미가 왜곡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사물의 외연 즉 상징일 뿐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 2020. 8. 20.
마그리트의 <치유자>를 읽다 마그리트 그림집을 보다가 문득 에서 멈췄다.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그의 그림은 불안한 내면과 공포를 표현하는 특징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어머니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14세 소년이던 마그리트에게 어머니의 자살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강렬하게 낙인됐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그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흰 천을 뒤집어 쓴 연인과 몸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얼굴들, 몸 속을 가득 메운 자연과 사물들, 떠다니는 의미와 상징들, 사물들 간의 부조화가 가득한 그의 그림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듯 기괴하고 초현실적이다. 무위식의 발현인 꿈은 의미있는 연결망으로써 한 인간의 욕구와 불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매우 사적이고 복잡미묘하고 심층적이다. 그래서.. 2020.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