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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내 맘대로 읽기45

겨울밤에 읽는 하이쿠(24.1월) 길고 긴 한 줄기 강 눈 덮인 들판 - 본초 강둑을 따라 걸었다. 강가 억새의 흐느낌을 다 받아주는 듯 겨울강은 제 가슴을 열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긴 강줄기를 따라 들판은 차라리 하얀 눈으로 덮여 있으면 좋으련만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일렁였다. ...너에 대한 마음에서 언제쯤 놓여날까?... 언제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말은 말이 되지 못해 눈물이 된다고 했던가... 터져 나오려는 말들과 뱉어낼 수 없는 말들이 엉키어 꺼억꺼억 소리만 토해내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는 소화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을 후벼팠다. 그랬다... 한 번도 감춰두었던 감정을 쏟아낸 적이 없었다. 그저 눌러두고 잠재우기 바빴다. 도망가고 회피하는 게 최선임을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살았다... 2024. 1. 15.
봄에 읽는 하이쿠(2022) 노란 유채꽃 확 번져서 환해진 변두리 동네 -시키 함양에 온 지 두 달이 되어간다. 농촌 경험과 농업 교육을 겸한 1년 살아보기 체류형 함양살이를 하면서 부산을 오가고 있다. 처음 이곳에 신청서류를 넣고 면접심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2월이었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던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부여잡고 휑한 눈으로 이곳을 둘러봤던 기억이 난다. 겨울의 삭막한 풍경만큼 마음도 을씨년스럽고 서걱거렸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 이곳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참새 혓바닥 같은 연둣잎이 돋고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록과 꽃이 확 번져서 변두리까지 환해졌다. 그래서인지 시키의 하이쿠는 그림 한 폭이 되어 마음 속으로 훅 들어왔다. 세 줄의 글이 그림이 되는 순간, 더욱 명징하게.. 2022. 4. 19.
겨울밤에 읽는 하이쿠(22.1월) 눈에 부러진 가지 눈 녹여 물 끓이는 가마솥 아래 -부손 부산엔 눈이 잘 오지 않는다. 눈을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릴 적 강원도에서 자란 나는 지겹도록 눈과 뒹굴며 살았다. 게다가 방학만 되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경상북도 봉화군 봉성읍 남면.... 도로가 없어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야 나오는 오지 마을엔자주 눈이 내렸다. 하얗고 탐스런 함박눈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곤 했었다.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새 내린 눈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처마끝에는 며칠 째 녹지 않은 고드름이 달려 있고우물은 얼어 물을 구하지 못할 때,할아버지는 커다란 가마솥에 눈을 퍼 담고는 불을 지폈다. 지금 가만히 떠올려 보면 시골의 겨울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눈의 .. 2022. 1. 10.
12월에 읽는 하이쿠 (2021) 고요함이여 호수의 밑바닥 구름의 봉우리 -잇사 겨울 풍경 속을 걷는다. 바람은 차고 공기는 맑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는 제 몸을 일렁이지 않는 호수는 물의 무늬 만으로 가장자리까지 꽉 채운다. 고요하다. 호수의 밑바닥까지도 고요한지 산도 하늘의 구름도 온전히 담아낸다. 내 마음도 겨울의 호수 같이 고요했으면 좋겠다. 어떤 일렁임도 의심도, 계산도 없이 모든 것을 온전히 그대로 다 담아내면 좋겠다. 겨울의 물 나뭇가지 하나의 그림자도 속이지 않고 -구사타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물속이나 산의 높이는 끝이 있어 잴 수가 있지만 사람의 속은 형체도 없고 정함이 없으니 그 속을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언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 놓고 풍덩 빠져보지만 금세 얕아진 .. 2021. 12. 28.
11월에 읽은 하이쿠2 국화가 나른하다고 말했다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헤키고토 6개월 만에 다시 블로그를 시작한다. 국화가 나른하다고,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여름의 끝자락에 묻어 있는 더위를 견디고 선선한 가을 바람에 살 만도 하겠는데 나른하다고, 견딜 수 없다고 한 건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일어나지 않는 무료함 때문인지도... 어쩌다 가끔 찾아오는 벌과 나비, 주변을 둘러봐도 외로이 꽃 피운 건 자신 뿐, 이제 곧 추운 겨울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어... 삶이 너무 나른해.... 그래 그렇게 말이라도 하면 들어주는 이가 분명 있을 거야. 남은 생 얼마큼인가 밤은 짧고 -시키 친구 소세키에게 보낸 편지에 이 하.. 2021. 11. 3.
3월에 읽는 하이쿠 보이는 곳마음 닿는 곳마다올해의 첫 벚꽃 -오토쿠니 파란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벚꽃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꽃이었다. 건물을 오려내면 파란하늘과 꽃만 남을 것이다. 이미지가 너무 닮은 풍경이다. 보통 남쪽 지방의 벚꽃 개화시기는 3월 중순쯤인데 벌써 벚꽃이 피다니 무슨 일일까?...봄이 되어도 벚꽃이 피고 진 것도 모른 채 봄을 보낸 적도 있고벚꽃이 언제 피나하고 기다리며 봄을 맞은 적도 있다.그런데 올해는 느닷없이 벚꽃이 피었다. 너무 때 이른 개화 앞에 어리둥절하다.올해의 첫 벚꽃이다.보이는 곳 마음 닿는 곳마다 기다리지 않아도 느닷없이 핀 벚꽃 때문에 기다리는 설레임보다 앞선 건 어리둥절이다.피어도 너무 많이 피었다.왜 그랬니?.. 꽃샘 추위에 질까 걱정된.. 2021. 3. 2.
르네 마그리트 <투시>를 읽다 남자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알을 보면서 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정말 놀라운 능력이다. 투시는 감각 기관이 아닌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감지하거나 막힌 물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을 말한다. 화가는 알속의 새를 그려내고 있다., 둘 중 하나다. 사기꾼이거나 진짜 능력자이거나... 알에서 새가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화가가 그리는 새가 정말 알에서 깨어난다면?.. 아무튼 문제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flower-thief20.tistory.com/277?category=804438 르네 마그리트 을 읽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상하다.. 하늘은 낮이고 지상은 밤이다. 상식과 완전 배치되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쪽과 .. 2021. 2. 24.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을 읽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상하다.. 하늘은 낮이고 지상은 밤이다. 상식과 완전 배치되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쪽과 저쪽이 다른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위해서는 현실은 잠시 잊기로 하자. 빛의 제국으로 가는 두 갈래의 길부터 찾기로 하자 아니 그보다 어느 쪽이 진짜 빛의 제국인 걸까... 밤이 찾아온 지상의 집에는 불이 켜져있다. 집 주위의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벽난로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춥지 않은 늦봄이나 여름 쯤으로 보인다. 뜰과 방안 불빛은 그다지 밝지 않은 은은한 조명에 가깝고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다. 이제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노부부의 방일까? 빛의 제국에서는 어둠과 빛이 함께 존재해야만 서로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내게 마련이다. 지상의.. 2021. 2. 18.
2월에 읽는 하이쿠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산토카 마른 나뭇가지에 까마귀들이 날아와 까맣게 앉았다. 한 두마리 푸르륵 날갯짓을 하니 모두 함께 날아올라 밭가에 내려 앉는다. 바람은 차고 하늘은 맑다.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이 한 줄의 시로 묻고 싶다. 너희들은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지.. 또 나는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지... 그러고보면 삶은 늘 길 위에 있는 시간들이었다. 무언가를 찾고자, 얻고자 헤매고 달리고 방황하며 보냈다. 하지만 가끔 멈춰서 되돌아보면 무엇을 찾아 길을 가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묻곤 한다.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일까?... 올빼미여 얼굴 좀 펴게나 이건 봄비 아닌가 -잇사 우리 모두 얼어붙은 겨울이 너무 싫은 올빼미.. 2021.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