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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형시5

겨울밤에 읽는 하이쿠(24.1월) 길고 긴 한 줄기 강 눈 덮인 들판 - 본초 강둑을 따라 걸었다. 강가 억새의 흐느낌을 다 받아주는 듯 겨울강은 제 가슴을 열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긴 강줄기를 따라 들판은 차라리 하얀 눈으로 덮여 있으면 좋으련만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일렁였다. ...너에 대한 마음에서 언제쯤 놓여날까?... 언제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말은 말이 되지 못해 눈물이 된다고 했던가... 터져 나오려는 말들과 뱉어낼 수 없는 말들이 엉키어 꺼억꺼억 소리만 토해내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는 소화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을 후벼팠다. 그랬다... 한 번도 감춰두었던 감정을 쏟아낸 적이 없었다. 그저 눌러두고 잠재우기 바빴다. 도망가고 회피하는 게 최선임을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살았다... 2024. 1. 15.
봄에 읽는 하이쿠(2022) 노란 유채꽃 확 번져서 환해진 변두리 동네 -시키 함양에 온 지 두 달이 되어간다. 농촌 경험과 농업 교육을 겸한 1년 살아보기 체류형 함양살이를 하면서 부산을 오가고 있다. 처음 이곳에 신청서류를 넣고 면접심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2월이었다.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던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부여잡고 휑한 눈으로 이곳을 둘러봤던 기억이 난다. 겨울의 삭막한 풍경만큼 마음도 을씨년스럽고 서걱거렸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 이곳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참새 혓바닥 같은 연둣잎이 돋고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록과 꽃이 확 번져서 변두리까지 환해졌다. 그래서인지 시키의 하이쿠는 그림 한 폭이 되어 마음 속으로 훅 들어왔다. 세 줄의 글이 그림이 되는 순간, 더욱 명징하게.. 2022. 4. 19.
3월에 읽는 하이쿠 보이는 곳마음 닿는 곳마다올해의 첫 벚꽃 -오토쿠니 파란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벚꽃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꽃이었다. 건물을 오려내면 파란하늘과 꽃만 남을 것이다. 이미지가 너무 닮은 풍경이다. 보통 남쪽 지방의 벚꽃 개화시기는 3월 중순쯤인데 벌써 벚꽃이 피다니 무슨 일일까?...봄이 되어도 벚꽃이 피고 진 것도 모른 채 봄을 보낸 적도 있고벚꽃이 언제 피나하고 기다리며 봄을 맞은 적도 있다.그런데 올해는 느닷없이 벚꽃이 피었다. 너무 때 이른 개화 앞에 어리둥절하다.올해의 첫 벚꽃이다.보이는 곳 마음 닿는 곳마다 기다리지 않아도 느닷없이 핀 벚꽃 때문에 기다리는 설레임보다 앞선 건 어리둥절이다.피어도 너무 많이 피었다.왜 그랬니?.. 꽃샘 추위에 질까 걱정된.. 2021. 3. 2.
2월에 읽는 하이쿠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산토카 마른 나뭇가지에 까마귀들이 날아와 까맣게 앉았다. 한 두마리 푸르륵 날갯짓을 하니 모두 함께 날아올라 밭가에 내려 앉는다. 바람은 차고 하늘은 맑다.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이 한 줄의 시로 묻고 싶다. 너희들은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지.. 또 나는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지... 그러고보면 삶은 늘 길 위에 있는 시간들이었다. 무언가를 찾고자, 얻고자 헤매고 달리고 방황하며 보냈다. 하지만 가끔 멈춰서 되돌아보면 무엇을 찾아 길을 가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묻곤 한다. 무엇을 찾아 바람 속을 가는가.... 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일까?... 올빼미여 얼굴 좀 펴게나 이건 봄비 아닌가 -잇사 우리 모두 얼어붙은 겨울이 너무 싫은 올빼미.. 2021. 2. 15.
겨울밤에 읽는 하이쿠2 한겨울 칩거다시 기대려 하네이 기둥 -바쇼 그야말로 한겨울 칩거다.사방은 고요하고 세상은 정지되어 버렸다.갈 곳도 없고 갈 곳도 잃어버린 채 멍하니이 자리에서 삶이 얼어붙었다.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다시 일어서고자 할 때 삶이 휘청이면 어쩌지?그때 무엇에 기대야 할까...다시 기댈 수 있는 기둥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그게 너라도 상관 없고또 다른 나라도 상관 없다.그래도 기울어버린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게 나 자신이었으면 하는 것은결국 삶은 혼자 서는 것이므로내 안의 단단한 기둥 하나쯤을 가지고 싶은 거다. 모조리 죽어버린 들판에 내 발자국 소리 -호사이 이 짧은 한 줄의 시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풍경을 담아내는지 정말 감탄스럽다.모조리 죽어버린 겨울 들판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시인이 그.. 2021.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