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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내 맘대로 읽기64

가을밤에 읽는 하이쿠 11 거미로 태어나 거미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 교시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하이쿠 시집을 넘기다가 교시의 시에 눈길이 멈췄다 '거미로 태어나 거미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라는 싯구가 '인간으로 태어나 ( ) 않으면 안 되는 건가'로 읽혔기 때문이다 물론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말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거미줄을 쳐서 먹이를 얻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거미처럼 인간 역시 생명활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노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개미처럼 단순한 노동이 아닌 유무형의 다양한 형태의 노동 말이다 인간의 삶이 여타 동물과는 다르게 고차원적인 것이라 해도 거미줄 치는 거미를 폄하할 수 있을까 쇠똥을 굴리는 쇠통구리를 폄하할 수 있을까 현대 하이쿠 시인 가토 슈손은 이렇게 말.. 2024. 11. 17.
가을밤에 읽는 하이쿠10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어라 저무는 가을 -부손 어렸을 때는 이런 맛을 몰랐다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는 줄 오랜 시간 살아보니 알겠다 그것도 저무는 가을에... 오롯이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 침묵할 수 있는 시간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무언가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찾아 온다 가끔은 일부러 나를 고립시킨다 유흥과 유혹의 시간을 거절하고는 마음의 들뜸이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곤 한다 그러면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텃밭에 주저앉아 풀을 뽑곤 한다 가끔은 실패할 때도 있다 가령 갑자기 심심하거나 들뜸이 가라앉지 않을 때 평정심이 느닷없이 무너질 때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달래려 차가운 맥주를 몸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 2024. 11. 16.
가을밤에 읽는 하이쿠9 먼 산의 해와 맞닿은 시든 들판 - 교시 어디선지 모르게 떨어진 낙엽 길 위를 걸었다 바스락 바스락 참 듣기 좋았다 발 아래 무수히 깔린 낙엽들 나뭇잎이 떨어질 때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나뭇가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내게서 떨어져나간 것들은 내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짐짓 모른 척 했을 수도 먼 산의 해와 맛닿은 시들고 마른 들판은 계절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비유이기도 한 것을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나도 저와 같을까... 나뭇잎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나뭇가지처럼 내게서 멀어진 것들 떨어져 사라진 것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망연자실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다 아니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만 미련 없이 떠나라 아니다 부디 끝까지 .. 2024. 11. 15.
가을에 읽는 하이쿠8 가을 깊어져 나비도 핥고 있네 국화의 이슬 -바쇼 얼마 전 노랑나비를 봤다 늦가을까지 살아 있다니 그저 놀라웠다 가을은 나비에게는 마지막 계절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나비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나비들은 가을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국화에 모인 이슬을 먹으면 수명을 연장해 준다는 설화가 있다 노랑나비도 국화에 모인 이슬을 먹은 건 아닌지... 생을 다하고 스러져가는 건 모든 동식물이 겪는 일이다 바쇼 또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시를 수십 편 남겼다 시인에게 국화에 고인 이슬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한 가을밤이다 2024. 11. 14.
늦가을 밤에 읽는 하이쿠7 돌아보면 장지문 문살에 어린 밤의 깊이 - 소세이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볼 때가 있다. 도시와 달리 시골은 한점 불빛조차 없어 새카만 커다란 도화지가 눈앞을 가로막은 기분이 들곤 한다 평면인 까만 세상 깊이도 굴곡도 명암도 채색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장지문 문살에 어린 밤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조금씩 어둠이 쌓여가던 풍경을 그린 것인지 마음 속 불안을 밤의 깊이로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밤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로선 한 줄의 시에서 마치 영상을 보듯 어둠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인이란 존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한 세계를 열어젖히고는 기꺼이 그곳으로 초대를 하곤 한다 기꺼이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나로선 기쁘고 설레는 일이다 2024. 11. 13.
늦가을에 읽는 하이쿠6 이름 몰라도 모든 풀마다 꽃들 애틋하여라 - 산푸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기 만의 꽃을 피운다. 그것을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말이다. 모든 만물은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름 모를 꽃과 풀조차도 애틋하게 여긴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피고 지는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따뜻해서 좋다. 더 나아가 꽃과 풀 조차도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애틋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 또한 시한부 인생이거늘 한창 꽃 피울 때를 알거니와 지고 있음을 왜 모르겠는가, 이 늦가을, 많은 것이 시들고 스러져가고 있다. 세상에 애틋하지 않는 것이 없는 계절이다. 그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온기가 돈다. 더 많이 사랑해야지... 2024. 11. 12.
늦가을에 읽는 하이쿠5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어라 저무는 가을 - 부손 부손은 늙어서까지 시와 그림에 몰두했다. 시와 그림은 혼자 할 수 있는 놀이이자 취미로 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혼자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노년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불청객과 같으니 잘 지내려면 더더욱 그리 해야 한다고 한다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으려면 오롯이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가을, 저무는 가을 저녁에 생각도 깊어 진다. 2024. 11. 11.
몸에 스미는 무의 매운맛(하이쿠3) 몸에 스미는 무의 매운맛 가을바람 -바쇼 얼마전 내린 첫서리에 호박잎은 시들해졌지만 무청은 파릇파릇하니 여전히 싱싱하다. 몸집도 제법 큼직해져서 그중 굵은 것을 뽑아서 동태국을 끓였다 이른 수확이어서인지 흰 부분은 매운맛이 돌았다 몸에 스미는 것은 톡 쏘는 무의 매운맛이나 늦가을 찬바람이나 다를 게 없다 시인은 그걸 알아차리고 세 줄 하이쿠로 표현했다 2024. 11. 9.
늦가을밤에 읽는 하이쿠2(2024) 바람에게 물으라 어느 것이 먼저 지는지 나뭇잎 중에 -소세키 쉰 살에 위궤양 악화로 세상을 떠나며 쓴 시다. 소세키는 도쿄의 단골 병원에 갔다가 병원장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위중한 자신보다 먼저 떠난 것을 두고 어느 잎이 먼저 질지 아무도 모르니 바람에게라도 묻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나뭇잎이 먼저 질지 나무에게 묻지도 나뭇잎에게 묻지도 않았다 나뭇잎을 흔드는 건 바람이므로 바람에게 물으라고 한 것일까... 만약 나무에게 물어본다면 '때가 되면'....이란 답변을 들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아니아니 누가 알겠는가? 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을... 2024.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