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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내 맘대로 읽기

겨울밤에 읽는 하이쿠

by 나?꽃도둑 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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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이

밑빠진 듯 내리는

진눈깨비여

 

-조소

 

눈 녹아

온 마을에 가득한

아이들

 

-잇사

 

 

자가격리 4일 째. 

창밖으로 보는 겨울 풍경은 한없이 쓸쓸하다.

하얀눈이 쌓이진 않았지만 세상은 온통 얼어붙어 있다.

소박했던 삶도 일상의 자유도 사람들과의 만남도 일시정지된 상태로 겨울을 맞은 셈이다.

고립되고 소통부재의 시간속에 갇혀

뻥 뚫린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쓸쓸함을 견디고 있다.

엄청난 일을 겪었을 때 대자연의 위엄 앞에 인간은 살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웃음을 발명했다고 한다.

웃어야 하나?...

이 어이 없는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인간의 오랜 발명품인 웃음은 해결책이 되어줄까...

다행이 남편은 경미한 증상을 보이고 있어서 낙담할 상황은 아니지만 쉽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 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늘어나는 추세여서 3단계 격상에 대해

신중히 검토중이라고 한다.

 

언제 이 얼어붙은 세상이 눈 녹듯 녹아 온 마을에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넘쳐날까...

번잡한 게 싫어 복잡한 게 싫어 시끄러운 게 싫어 피해다녔는데

이젠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마스크를 벗고 목젓이 보이도록 웃어제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번 일로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깊이 느끼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첫눈 위에

오줌을 눈 자는

대체 누구지

 

-기카쿠

 

 

순백의 눈 위에 누가 오점을 남겼을까

나도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다. 초등학생이던 어느 겨울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는데 남동생이 하얗게 눈으로 덮인 마당에 오줌을 갈겼다.

노란 오줌 줄기는 하얀 눈 속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겼고,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화장실을 가면 될 일을 꼭 그러고 싶었을까.

어린 영웅은 하얀 눈 속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는 뿌듯한 영웅심이 그 작은 가슴에 자리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더럽다고 소리쳤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첫눈 위에 오줌을 눈 자도 작은 영웅으로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아. 혹시 모른다. 시인은 열받아서 만나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지...

 

 

 

 

 

첫눈 내리네

수선화 잎사귀가

휘어질 만큼

 

-바쇼

 

 

처음부터

벌어져 피는구나

눈꽃은

 

-시게요리

 

 

하얗게 쌓인 눈을 못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특히 부산은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

수선화 잎사귀가 휘어질 정도면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는지 알 것 같다.

가느다란 억새가 휘어질 정도로만 와도 좋겠다.

그러면 정말 처음부터 벌어져 피는지 눈꽃을 유심히 보고 싶다.

제주도 한라산에 갔을 때 빈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핀 눈꽃을 오래도록 봤음에도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인의 관찰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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