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94

일요일 오후, 하이쿠를 읽다 이 시집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자마자 샀다. 출판사에서 푼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완전 새책이었다. 그것을 반값에 샀으니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하이쿠에 대해서는 바쇼 정도만 알고 있던 터라 이 시집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제본상태, 편집, 류시화 시인의 해설, 중간 중간 들어 있는 그림 등 탄성이 나올 만큼 마음에 들었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바쇼 목욕한 물을 버릴 곳 없네 온통 풀벌레 소리 -오니쓰라 하이쿠의 매력은 짧지만 그림을 보듯 이미지가 선명하거나 의미의 확장성이 크다는 점이다. 7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맛있는 치즈 케이크를 아주 조금씩 떼어 눈을 감고 음미하듯 그렇게 읽고 있다. 바쇼의 하이쿠와 오니쓰라의 하이쿠는 여름.. 2020. 8. 23.
기가 막힌, 문어 낚시 여름휴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방파제에서 했던 문어낚시다. 동이 터오기전 낚시를 하기 위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을 겸한 낚시점에 들러 갯지렁이 밑밥 새우등의 미끼를 샀다. 낚시를 경험하고 싶어서 아침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섰다. 잠을 깨울 요량으로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옅은 어둠속에서 모든 것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들뜨지 않은 세상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기분은 뭐랄까, 잠자는 사자의 등을 밟고 지나는 묘한 흥분이 있었다. 방파제에 도착할 무렵 수평선 너머로 희붐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낚싯대에 미끼를 끼워 여자들에게 건네주었다. 여동생과 나는 세상 둘도 없는 재밋거리를 찾은 거 마냥 낚싯대를 바다에 던지기를 반복했다 새우를 끼워 던지면 깜쪽같이 사라지고..... 2020. 8. 22.
5. 눈부신 바다, 남해 친정 식구들과 남해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2박 3일 일정을 주로 납해탐방과 맛있는 것 먹기, 낚시 등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선 남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삼천포 시장에 들러 장어와 전어, 잡어회를 샀다. 미리 예약해둔 창선(삼천포와 남해읍 중간 지점으로 기억)에 위치한 팬션에서 짐을 풀고나니 시간은 그렇게 저렇게 지나가고 저녁이 되었다.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저녁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멀리 삼천포항의 불빛이 점, 멸, 점, 멸 하다가 아련한가 싶다가도 반짝반짝 제 빛을 찾아갔다. 남해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는 데 있어서 최적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직선과 곡선이 적절하게 있어 지루하지 않거니와 숨바꼭질 하듯 바다는 숨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 차로 한 바퀴 돌면서 남해금산 보.. 2020. 8. 21.
르네 마그리트의 <현재>를 읽다 그림 그리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시적인 것이다 라고 했다. 시적인 제목은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들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화가라는 이름보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는데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곤 한다. 즉 감상자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퍼즐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다. 무수한 이미지와 상징은 우리에게 건너오면서 제대로 전달되기도 하지만 의미가 왜곡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사물의 외연 즉 상징일 뿐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 2020. 8. 20.
마그리트의 <치유자>를 읽다 마그리트 그림집을 보다가 문득 에서 멈췄다.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그의 그림은 불안한 내면과 공포를 표현하는 특징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어머니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14세 소년이던 마그리트에게 어머니의 자살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강렬하게 낙인됐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그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흰 천을 뒤집어 쓴 연인과 몸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얼굴들, 몸 속을 가득 메운 자연과 사물들, 떠다니는 의미와 상징들, 사물들 간의 부조화가 가득한 그의 그림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듯 기괴하고 초현실적이다. 무위식의 발현인 꿈은 의미있는 연결망으로써 한 인간의 욕구와 불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매우 사적이고 복잡미묘하고 심층적이다. 그래서.. 2020. 8. 19.
2. 야옹~ 야옹~ 내가 왔어 한 달 전 일이다. 퇴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우스 뒤에서 느닷없이 가녀리고 구슬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보니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었다. 노란색 털을 지녔고 자그마한 입을 벌려 끊임없이 울어댔다. "냐옹~ 냐옹~" 어미를 찾는 건지 배가 고파서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찌나 애처롭게 우는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사무실 선반에 챙겨두었던 캔사료가 생각났다. 가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다보니 아는 분이 기증해주신 사료였다. 행여 놀라 달아날까 싶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놓아주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새끼 고양이는 사료를 먹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퇴근을 해야하는.. 2020. 8. 18.
1. 죽은 물고기만 강을 따라간다 첫날이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 아니 글을 꾸준하게 습관처럼 쓰고자'30일 매일 글쓰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다. 강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어떤 저항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정신이 든 건 내가 너무 멀리 떠내려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의식 같은 거였다. 성장이 멈춘 채 그냥 일상에 안주해버린 못난 내가 보였다. 매번 작심삼일로 끝난 기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었다. 그렇다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속 열망과는 달리 내 몸은 언제나 서늘했다. 글은 엉덩이의 힘으로 쓴다고 했다. 나는 늘 그게 부족했다. 진득하지 못하고 귀찮다고 여겨지면 그대로 포근한 일상속으로 몸을 숨.. 2020. 8. 17.
<배우는 배우다>- 일단 뜨고 보자,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삶 일단 뜨고 보자,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인생도 있다. ‘일단’이라는 체념 혹은 맹목적 의지는 모멸감도 수치심도 견디게 하는 힘을 지닌다. 여기 연기자가 꿈인 오영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연극무대에서 연기와 생활체험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문제적 인간이다. 대본대로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출 줄 모르는 연기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오영은 결국 연극무대에서 쫓겨난다. 자신의 체험과 거리두기를 할 줄 모르는 연기자, 소통되지 않는 자기세계에 빠져 감정에만 몰입하는 오영은 아무도 밟지 않은 신대륙인 셈이다. 사실 자아보다 큰 벽은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하기 싫은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분명 자존심이 버티고 있다. 오영은 재기를 노리는 연예기획자의 손에 이끌려 영화바닥으로 들.. 2020. 5. 26.
<카얀> - 당의정 속에 숨겨진 인생의 쓴맛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9389# 카얀 ‘카얀’이라는 레바논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이혼녀 하닌의 하루 하루는 바쁘고 고달프다. 두 딸을 보... movie.naver.com 인생은 고달프다. 달달한 당의정을 입힌 약처럼 인생의 쓰디씀 위에 덧입혀진 당의정 같은 요소들에 우리는 가끔 눈멀고 미혹에 빠져 허우적댄다. 사랑도 그러하고, 꿈도 그러하고, 한때의 꽃다운 젊음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마음도 그러하고, 그러하고...또 그러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러한 당의정으로 인해 우리는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땅에서 발을 가장 멀리 떼고 오르는 순간, 이적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은 행복감으로 충만한 상태와 기쁨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살.. 2020.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