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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염소의 축제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by 나?꽃도둑 2020.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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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염소의 축제 1 (양장)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장편소설. 32년간 도미니카공화국을 통치해온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의 암살 과정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건은 트루히요의 총애를 잃은 장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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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불꽃이다.' 라고 한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드디어 2010년 노벨문학상을 통해 그의 이름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독재소설의 한 원형을 이루었다는 찬사와 함께 권력과 부조리에 문학의 불꽃을 활활 태워버린 뒤에 찾아온 영광은 무엇보다 찬란했을 것이다. 문학은 사회의 등불이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 천명에 따라 씌여진 [염소의 축제]는 도미니카를 32년간 집권한 독재자인 트류히요 집권 말기를 다룬 소설이다.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소설을 만들어낸 저변엔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 인물들의 중첩되는 목소리를 들려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들고, 인물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복잡한 심정을 따라가며 일거수일투족 함께 하게 된다.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Rafael Leónidas Trujillo Molina, 1891년 10월 24일 ~ 1961년 5월 30일

 

 책을 읽으면서 32년간이나 공포정치를 해온 트루히요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온 혹은 견디어 온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인간은 왜 악(권력)에 굴복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암살당하기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저변엔 어떤 요인이 있었던 것일까,  

 '악이라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심지어는 의무로까지 여겨진다.' 고 한 시몬느 베이유의 말에서 일말의 실마리를 찾아 따라가 보면 트루히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조국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라는 말로 독재정치를 필연성으로 정당화 시키고 있다. 독재자들의 특성인, 현실왜곡, 거짓말, 술수, 애국심에 호소, 이데올로기와 초월적인 미래의 삶을 선전하며 이를 방해하는 반대파에 대해서는 '적대적 상상력'을 사람들에게 심는 무자비함을 트루히요는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작된 역사와 반아티에 대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장기간의 집권이 가능했던 트루히요 정권은 조니 아베스 가르시아라는 냉혈한이 지휘하는 비밀경찰의 힘을 뒤로 업고 온갖 악행과 파렴치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나갔던가,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행했다. 이성은 없고 오로지 행동하는 자들만 남아 트루히요에 맹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이익과 생명을 지켜주고 그것을 증대시켜 주리라는 믿음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트루히요와 동일시하는 그의 추종자들을 다스리던 방식은 그러한 유혹과 우라니아의 아버지인 카브랄 상원의원이 어느날 갑자기 배척당한 것처럼 유혹과 배척의 협박을 결합한 양날로 복종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서로를 감시해야 하는 체제 속에서 친구라고 여겼던 자가 하루아침에 적이었다는 사실을 통렬히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에 전력을 다한 것 같다. 여러 명의 목소리로 트루히요와의 관련된 경험을 증언함으로써 고요한 미소속에 숨어 있는 잔인하고도 냉혈적인 트루히요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권력구조의 지도를 그려내고 개인의 저항, 반역, 좌절을 통렬한 이미지로 포착해냈다는 평을 받은 [염소의 축제]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개인의 자유를 짓밟은 바탕 위에서 공포정치를 무기로 개인의 부의 축적과 무분별했던 성욕을 과시했던 트루히요의 축제와, 암살자로 이루어진 트루히요 죽음의 축제는 비로소 자유를 찾은 국민들의 것으로 되돌아 온다. 하지만 23년간의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후 과거 집권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튀니지 사태를 보면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환호하며 그 잔당들을 제거하기 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염소의 축제는 아주 조용히 트후히요의 가족들과 측근들이 국외로 떠나고 비교적 조용히 수습되는 걸로  끝을 맺는데 CIA가 개입된 그들의 축제는 비로소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조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개인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과 악행을 정당화시킨 독재자를 우리 또한 역사에서 경험했다. 권력구조의 고리가 트루히요의 시대처럼 단단하게 옥죄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경험만으로도 사회적, 정치적 영향이 사람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게 되었다. 트루히요의 암살전과 그 이후의 장면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피와 고뇌와 증오가 녹아 있다. 특히 그들의 암살후 모든 정황이 뜻하는 바대로 흘러가지 않고 어긋나기 시작하자 그들 모두에게 닥쳐올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고통스럽고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메웠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이쯤에서 읽기를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끝장을 내야 하는 일에 생명을 담보로 뛰어들었던 그들을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던 것은 그들의 참혹했던 삶 끝에, 그들의 희생 위에 딛고 선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말이다.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막을 내린 트루히요의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며 사는 잔재들 또한 엿볼 수 있는 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디밀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아무튼 [염소의 축제]는 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 피와 오물로 얼룩져 있는 켜켜이 개어져 있는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어 내는 일을 마다 않는 저 지난한 여정 속에 작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소설 읽기가 아니라 실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일, 논픽션의 세계로 가는 일인 것이다. 고통스럽고 불가해한 일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지나간 일이니 염려 말라고?.... 그것은 결코 지난 일이 아니라 삶이 있는 한 진행형의 일이므로 몸서리를 치게 되는 것이리라. 삶에 대한 기록, 그 처절한 기록 앞에서 숙연해지는 건 그들이 겪었던 고통이 마음 속으로 삶 속으로 파고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루히요는 죽었어도 사람들 마음 속에는 그가 살아 있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트루히요의 시체를 가져오기만 하면 모든 걸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한 로만 장군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아니 배신에서 느낀 건, 죽어버린 트루히요의 유령마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길들여진 코끼리 마냥 마음의 감옥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정신까지 지배당한 가엾은 인간, 로만은 독재정치의 폐해를 고발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도미니카 역사를 개략적이라도 훑어 보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아진다. 현실과 허구의 접목에서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무엇보다 실재와 허구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는 우라니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은 트루히요가 행했던 일을 확장시키며 그때 그렇게 살아낸 무수한 여자들의 삶을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우라니아의 등장으로 소설의 열고 닫음은 소설을 짜임새 있게 만들어 준다. 영특하지만 평범한 소녀 우라니아의 시선은 35년만에 도미니카를 찾은 시점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꼭꼭 쟁여놓았던 아픈 과거를 털어놓고 주위 사람들과 화해함으로써 끝을 맺는 마지막 시선까지 잡고 있다. 소설 중간중간 트루히요의 관점에서 씌여진 부분에선 트루히요는 자신의 남성적 죽음을 목격하고 그 신화적 의미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기분 나쁜 시선을 의식하곤 하는데 소설이 끝나갈 무렵 그 시선이 우라니아였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문학적 기교를 통해 효과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라고 한 바르가스의 영리함이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리얼리즘를 바탕으로 씌여진 소설이지만 그 리얼리즘을 뛰어넘어 소설을 통해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전달하는 그 방식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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