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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앞에서 서성거리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나의 아저씨>에 대한 글을 읽고...

by 나?꽃도둑 202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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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나의 아저씨> 방영금지처분요청 글이 올라온 걸 오늘 우연히 읽게 되었다.

방영되던 해인 2018년에 올린 글이지만 내 주변에 글쓴이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이 글은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글쓴이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했다.  45세 남성과 21세의 여성의 로맨스가 부적절하며 앞으로 사회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다. 현실적으로 40대 남자와 나이어린 여자와의 만남은 사랑을 포장한 조건적 만남이거나 성매수일 경우가 높다고 하였다. 즉 40대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위계를 이용하여 성착취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는 이러한 행위에 힘을 실어줄 것이고 결국 착취는 사랑으로 포장되고 그 사랑은 정당성을 확보함에 따라 성폭력의 인프라는 더욱 더 공고히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글쓴이의 문제제기의 핵심은 요약하면 이렇다. <나의 아저씨>가 이러한 사회적 문제나 현실문제를 마치 20대 여성의 구원서사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과, 20대 남성 이광일이 이지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 폭력이 애정의 방식으로 보여준 것은 10대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만연한 성착취를 끝내기 위해 이 드라마의 영구적인 방영금지처분을 요청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나는 <나의 아저씨>를 인생드라마로 여길 만큼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방영금지처분요청을 할 만큼 불편한 이유들에 대해서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사실 현실은 영화나 소설과 드라마를 능가하기도 한다. 설령 글쓴이의 주장대로 40대 남자가 20대 여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을 가장한 성착취의 목적이 있는 현실이라고 해도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준 두 사람은 그런 관계가 아님을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마음의 장벽을 쌓아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만남이 다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거니와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비정규직인 어린 여자와 기득권에 속한 유부남의 구도에서 정해진 법칙처럼 성착취 문제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남녀가 꼭 육체로 성립되는 건 아니다.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고 살피는 것도 사랑이고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가지는 것도 사랑이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것도 사랑이다.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의 대상을 꼭 가족이나 또래로 한정시키는 건 우리 삶을 가두고 축소시키는 거나 마찬가지다.
40대 아저씨와 20대 여자가 서로를 측은하게 생각하며 서로를 치유하고 성장시키는데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은 아닐 것이다. 

세속적 사랑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박동훈은 어린 여자에 대한 환상도 없었고 이지안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이지안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에 대한 특히 남자 어른에 대한 불신과 상처로 인해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박동훈을 도청하면서 그의 진솔한 모습에서 진실한 한 인간을, 진짜 어른을 만나게 되면서 심경의 변화가 온 것 뿐이다.

 

박동훈이 오열하는 장면도 많은 시사점이 있다. 이지안은 부산으로 떠나고 아내는 미국으로 떠나자 홀로 남은 집에서 밥을 먹다가 오열한다.  박동훈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동안 부정했던 모든 것, 나이가 한참 어린 이지안에게 삶을 위로받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았음을 그게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지적했던 부분 중 하나인 어릴 적 친구인 이광일에 대한 평이다.

20대 남성 이광일이 이지안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에서 폭력이 애정의 방식으로 보여준 것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다.

나 역시 조금 불편한 구석이 있던 장면이다. 하지만 이광일이라는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를 이해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이광일은 이지안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좋아했고 어쩌면 여전히 진행중인 감정과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감정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이지안을 괴롭히고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야 자신의 삶이 정당성을 얻을 테니까.. 그래야 이지안 곁에서 맴돌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이광일의 삶의 방식인 셈이다. 그렇다고 그 폭력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아니다. 이광일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혼돈 그 자체다

그런 이광일도 마지막엔 진짜 사랑이 뭔지를 알게 된다.

 

 

 

 

 

 

 

드라마 속의 세계는 또 하나의 현실적 시공간이다. 아무리 허구와 짜여진 극본대로 움직이는 세상이긴 해도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읽어내고 또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는 건 백번 공감은 가나 이걸 공론화하겠다는 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는 있다. 하지만 내 주장을 내세우기 전 두루 살피는 신중함도 필요해 보인다.

 

<나의 아저씨>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잘 녹아 있는 드라마다. 평범하고 어찌보면 찌질한 인생들을 살피고 보듬고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다. 면면히 살펴보면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품는 방식에 대해서도 얼마나 진솔하고 따뜻한지 이러한 스토리에 남녀의 세속적인 사랑을 대입시키고 나이차가 많다는 이유로 성착취의 알고리즘으로 해석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나이를 떠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말이다. 왜 이지안과 박동훈의 관계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야만 할까?

우리 모두는 사랑과 존중, 위로, 인정, 공감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필요한 것들의 결핍이 결국 인간을 어긋나게 하고 마음의 병을 만들기도 한다.

 

글쓴이는 <나의 아저씨>가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사실 문제가 없는 영화나 드라마가 어디 있으며 문제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조금 삐걱거리지만 따뜻한 삶의 드라마를 흑백으로 분명하게 가리고자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삶이 흑백을 가르는 일처럼 명백한 것도 아닌데.....모두의 삶을 주인공처럼 비추는 따뜻한 삶의 드라마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내 마음 속에 얼음이 들어 있지 않나 살펴볼 일이다.

 


어떠한 틀로 세계를 보고 해석했는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글쓴이가 나의 아저씨를 불편한 시각으로 보고 우려한 만큼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연세대 마광수 교수의 필화사건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즐거운 사라>출간 당시 그는 미풍양속 위배와 풍기문란으로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다. 성적판타지가 세상을 망칠 것처럼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판결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음란물이니 온갖 동영상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깟 드라마 하나로 사회적 물의와 악영향을 끼친다면 그와 유사한 영화나 드라마 같은 픽션은 다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지 오래된 '롤리타'가 세상을 어지렵혔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 여자라고 해서 판단능력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드라마 하나가 세상을 어지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뭐든 금세 잊혀지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세상에 그렇게까지 염려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flower-thief20.tistory.com/165?category=769514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

2018년에 방영된 tvN 16부작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넷플릭스에서 3일에 걸쳐 정주행했다. 평소에 거의 드라마를 보지 않는데 파울로 코엘료가 하도 극찬을 하길래 호기심이 발동했다. 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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