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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책] 서른의 반격 ㅣ 손원평 장편소설

by 나?꽃도둑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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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서른의 반격>은 주인공인 지혜가 태어나던 1988년으로 시작한다. 보통사람을 외쳤던 전 대통령의 등장은 참으로 적절하게 소설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권위와 권력, 허위와 부당함에 진짜 보통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고 얽혀 있는지 독자를 끌어들여 그 속에서 경험하게 한다.

이 소설에는 착취와 부당한 일을 겪은 네 명의 인물이 나온다. 대기업 DM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비정규직 인턴으로 일하는 서른 살의 지혜, 책과 강의로 유명한 박 교수에게 자신이 쓴 원고와 아르바이트비를 착취당한 규옥, 자신의 시나리오를 대기업에 도둑맞은 무명작가인 무인, 고생해서 만든 떡볶이 소스 비법을 빼앗긴 먹방계의 지존인 남은이 나온다.

우쿨렐레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네 사람은 술자리를 가지면서 각자 억울한 일을 말하게 된다. 규옥은 억울함에 뒷말만 하지 말고 반격에 나서자며 가치의 전복에 대해 말한다.

 

지혜는 성희롱을 일삼고 매너 없는 김 부장을 떠올린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괜히 말했다가 해고당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한다. 그에 규옥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게 될지 한번 실험해보자고 제안한다.

처음 김 부장을 골탕 먹이는 일로 시작된 반격은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으나 일이 실현되자 지혜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그 일로 불빛을 보게 된 네 사람은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 소소하지만 균열과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에 시원함과 재미를 느끼지만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대기업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도둑맞은 무인을 돕기 위해 행동으로 옮겼지만 끝내 무인은 나서지 않는다. 얼마의 돈을 받고 물러선 것이다. 어차피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은 일을 할 바에야 현실적인 타협을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입장이 돼봐. 당신들이라면 안 그럴 것 같아?” 반격하던 무인의 일은 의기투합했던 모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정말 무인의 말처럼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거대한 괴물과 맞서서 정의를 외치며 부당한 것을 바로잡겠다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싸울 용기를 냈을까?……

영리하게 현실적으로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는 동생 지환이 던진 말에 대해 고민을 한 지혜처럼 나 또한 무인의 말을 곱씹게 되었다. 정말 무엇이 옳은 삶일까? 한심하다고 욕하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규옥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래전 독재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목숨 받쳐 민주화를 이루어낸 것은 보통사람들이었다. 엄혹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뜨거운 가슴과 정신은 오늘날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김 부장도 지혜가 태어날 무렵 민주화 투쟁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점점 속물로 변해간 것은 자산이 생기면서 보수화 된 것이리라.

사실 김 부장과 무인의 모습은 적당히 눈치보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항의하고 따져봤자 골치 아프거나 손해 보거나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이게 현실이고 이게 사회다.’ 라고 부정할 수 없는 상태, 구조적 모순이네 뭐네 하면서도 우리는 수긍하거나 포기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책 속의 인물들은 달랐다. 순간 멈칫하긴 했지만 끝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침묵하지 않고 부당함에 파동과 균열을 주는 일을 해내었다.

지혜가 친구라고 믿었던 공윤을 부정하는 순간,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한 것이다. 또한 규옥에게서 깨달음을 얻게 된 지혜는 아주 작은 파동으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고 허위나 부당함에 맞서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기성세대들이 구축해놓은 곳으로 발을 들여 놓은 이제 서른을 맞은 지혜는 내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시대와는 양상이 다르다. 육포시대라고 명명되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속에서 길을 찾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 수도 있겠고 아주 멋진 반격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려우면 연대하면 된다. 우리 모두 규옥의 말대로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다소 귀찮고 번거롭고 손해와 수고가 따르는 일이긴 하지만 그걸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존엄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른의 반격>을 읽으면서 나는 서른 즈음에 어떻게 살아왔나 되돌아보았다. 부당함에 한번이라도 반격에 나선 적이 있었던가? 구겨진 자존심을 끌어안고 끙끙대던 초라한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매번 상처받고 물러선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좀 손해 보면 되지, 나 하나 참으면 되지 하면서 그게 미덕이라고 여겼다.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조금 비굴하지만 영리하게 현실과 타협하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권위에 맞서거나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어떤 삶이 온전하고 옳은 삶인지 우리 자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우리가 우주 속의 먼지와 같은 존재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 있다는 지혜의 독백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특별함이 아닌 하나뿐인 존재로 자신을 만나게 되는 순간을 이미 절반의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빛나는 수많은 무지개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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