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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책] 겨울밤 0시5분/황동규

by 나?꽃도둑 2021.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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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 정류장, 마을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센터 '밭에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에서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린 거야.'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바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경)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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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황동규의<겨울밤 0시 5분>를 꺼내들었다.겨울밤에 읽으면 좋은 시들이 들어 있는 시집이다 쓸쓸하고 쓸쓸한...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허름한 일상을 살피고 때론 멀치감치서 관조하며 그 언저리를 더듬어보는

시인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때론 시니컬하다.

한밤중에 별을 보며 거리로 나온 시인은 어쩌다 한두 깃 바람에 날리는 눈을 맞으며 간판이 바뀐 상점을 지나쳐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서 시인도 막차로 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속으로 '오기만 와바라' 하고 벼르는 시인이나,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여자나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언가 간절함이 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상황은 어둠도 아닌 빛도 아닌 상태로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과도 같은 일이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본 사람은 이런 간절함이나 절박함을 안다.
0시5분 이제 막 어제를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는 시간이다. 어제와 오늘이 잠깐 머물러 있는 시간이자 어둠과 빛이 잠깐 머무는 시간이기도 하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별의 말을 빌어 시인은 삶을 통찰하고 있다.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을 원하느냐고? 비록 잠깐의 빛을 내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하고 말이다.

혜성이 지구를 지나가며 남긴 먼지 찌꺼기가 대기권으로 떨어지면서 얼렸다 녹으면서 마찰로 빛울 내뿜게 되는데 바로 혜성의 별똥별이다. 잠깐 빛을 내는 먼지 같은 삶, 어둠이 없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우리의 삶도 때론 어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잠깐의 반짝임으로도 살맛이 나기도 하고, 그 추억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인생이 빛으로만 가득찰 수 없듯이 지금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잠시 어둠과 빛의 어느 중간 지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던가?...
그래 어둠이나 빛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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