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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책]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by 나?꽃도둑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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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일터넷서점

 

요리 프로그램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텔레비전 채널마다 방송을 할 만큼 인기의 배경에는 요리와 오락을 접목시켜 시청자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리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낸다. 요리사는 맛의 극대화를 위해 요리의 팁을 알려 주곤 하는데, 요리에도 과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무엇을 넣을 것인가의 순서의 문제, 불의 세기와 조리시간, 양념의 양 등 음식재료간의 궁합들로 인해 요리는 한층 더해진 맛과 영양의 두 마리 토끼를 쫓게 된다. 그야말로 맛과 영양의 과학이다.

 

그만큼 과학은 일상생활에 깊숙이 관여한다. 과학은 모든 것에 보다 보편적이고 신뢰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 대답을 하려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틀 안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과학적 앎의 틀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은 우리의 행동양식이나 가치체계, 사고방식 등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삶의 토대를 만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기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문명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 도구로서의 과학과 삶의 기반인 문화로서의 과학은 실용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지만, 과학을 전면에 내세워 사유하거나 성찰할 기회를 얻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과학은 물리학의 법칙을 토대로 모든 결론을 유도해내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표 수집에 불과하다’고 역설한 러더포드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과학은 마치 정답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풍당당하다. 시키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소수의 전문가들이 세운 철옹성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과 과학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보는 환원론적 태도나 일원주의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앞으로만 달려가는 자동차의 운명과도 같다. 제 아무리 능숙한 솜씨로 운전을 잘 한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이다. 자기반성과 성찰이 없이는 고장 난 브레이크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솜씨만 믿고 독단과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이 과학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과학을 반성하고 성찰할 것인가? 장하석은 그 문제의 해답을 과학철학에서 찾는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의 저자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석좌교수이자 과학철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받은 석학이다. 과학철학을 교양과목으로 20여 년간 런던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하였는데, 그 내용을 바탕으로 EBS에서 특별기획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던 것이 동명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큰 주제에 따라 관련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과학의 전반적인 인식에서부터 과학에 던지는 질문과 답으로 꾸며져 있다.

 

1부(1∼6장)는 ‘과학지식의 본질을 찾아서’ 라는 주제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과학지식이 갖는 한계. 과학적 업적으로써 수량화되는 것에 대한 검토, 과학은 혁명적으로 개편되는가, 과학적 진리는 무엇이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진보라 하는가, 등을 다루면서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해 놓았다.

2부(7∼10장)에서는 ‘과학철학에 실천적 감각 더하기’라는 주제로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이해를 돕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나 사례를 통해 전문성과 생활과학 사이를 오간다.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 '산소는 어떻게 발견했으며 왜 산소라고 하는가? 등의 주제로 직접 물을 끓여보기도 하고, 전기화학 반응을 실험해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3부(11∼12장)에서는 ‘과학적 지식의 풍성한 창조’에서는 획일성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제시한 과학다원주의 전망과 이점에 대한 장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이 무엇인지 돕기 위한 입문서로서 과학지식의 본질에 대한 일반론과 학자들이 내놓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소개함으로써 과학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과학철학은 자기 독단에 빠지기 쉬운 과학을 성찰하기 위한 도구로 추측과 반증, 비판적 질문을 이용한다. 가령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 과학이 정말 그렇게도 훌륭한가?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면서, 과학의 진리라고 하는 명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가령 기압에 따라 그릇의 종류에 따라 물의 비등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100도로 기준을 정한 것은 상황과 변수의 작용을 배제한 실험실 이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이 하는 활동 중 정말로 성과가 축적되고 진보하는 것은 과학뿐일까? 라는 질문을 통해 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인식을 드러낸다. 과학 또한 인간의 지적활동 중 하나이고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살아남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학만이 축적되고 진보 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은 아닐까?

여기서 책은 굵직한 사건과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 배후를 알려주기도 하고 본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학혁명이라고 불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뉴튼 역학, 다원의 진화론 등의 과학사의 큰 사건을 통해 진리라고 여겼던 과학적 토대가 과연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가? 모든 과학적 지식은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하는가? 하고 의심해 보기도 한다.

“과학이 성공적이라 해서 실재론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공 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살아남은 것은 다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

라우단의 비판적 귀납을 통해 절대 진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가 하면, 과학을 하는 태도에 실재론의 자리에 다원주의를 대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노이랏의 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를 타고 있는 항해자들과 같다. 배에 물이 새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우리 자신들의 배를 고쳐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에 과학에 대한 태도를 ‘든든한 기초의 토대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면 토대를 다지지 말고 강에 깊게 다리를 놓는 작업을 하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한 칼 포퍼의 견해와 함께, 밑에 구멍 뚫린 에펠탑 세우기의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밑에 구멍 뚫린 에펠탑 세우기처럼 과학은 확실성을 거부해야 만이 개선되고 발전된다고 보고 있다.

 

 

 

 

저자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회도 건강하려면 다원주의가 필요하듯이, 과학 역시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야심을 버리고 다원주의를 이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다원주의는 여러 실천체계를 유지함으로써 각각의 체계가 가져다주는 성과를 모두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원주의적 태도는 과학의 지식 체계가 가능한 한 분야 내에서도 여러 가지를 발달시키고 유지하기 좋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다원주의적인 과학은 다양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관용의 이득’ ‘상호작용의 이득’을 통해 지배적인 실천체계가 아닌 다른 실천체계도 공조할 수 있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다원주의적 과학은 예측불허의 상황에 보다 유연하게 대비할 수 있고 지적 분업도 가능하다는 것이 장하석의 견해다.

 

장하석은 다원주의 과학을 설명하면서 다양한 영역의 현상들을 하나로 융합하는데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은유적 도식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은유적 도식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은유적 도식에 관한 다른 책을 읽고서야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고 책에서 말하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은유적 도식은 정확하기는 하나 어떤 한계에 갇히는 과학의 논리적 언어보다는 비약과 단절로 인해 의미론적으로 두터워지는 은유를 통해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함이다. 은유는 다양한 계열과 영역을 지나며 많은 것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은유는 그 속에서 비약과 상징, 압축이 일어나므로 다양한 영역의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과학은 결코 이야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한 리오타르의 관점도 은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과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을 다양한 영역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고,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서사를 통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은 서사와 같은 것에 의존하여 추상적인 것을 감성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석은 과학을 하는 방법에는 가장 좋은 건 단 한 가지 라는 것에도 반론을 제기한다. 과학을 하는 방법에는 융합, 채택, 경쟁을 통해 인식활동들로 구성된 인식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진단하고 있다. 과학지식을 반증을 통해 쌓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뒤 인식적 반복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개선시켜 나가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융합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양한 접근이나 방법을 통해 독립적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하면 서로 끌어다 쓰는 융합은 학문 간의 통합이 아닌 여러 개의 지류 중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합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문간 통합에서 융합으로 통섭에서 합류로 변화되고 있고 그렇게 흘러갈 것이며, 지식기반사회에서의 지식은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고 동일한 규칙과 방법으로는 한계성을 가지므로 서로 섞이고 영향을 미치면서 함께 흘러 갈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한 가지 좋은 방법으로 통일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난장판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에 장하석은 이것은 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 못을 박는다. 상대주의적 관점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회의주의와 합쳐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책을 덮고 난 뒤 생각이 머무는 지점은 결국 과학에 대한 앎의 형식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어렵기만 하고 딱딱한 지식 위주의 과학교육은 오히려 사람들을 과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과학에 거리를 둘 뿐이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과학은 너무나 인간적인 학문이라는 것과 우리 생활과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얼굴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과학자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새로운 앎의 방식을 터득하자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과학지식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인 것이다.

 

 

책에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과학교육에 대한 언급이었다. 승자의 관점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배우거나 결과만 배우는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적절했다. 원소주기율표나 외우는 식의 교육은 정작 남는 게 없고 그저 학습하는 습관만 남게 하는 과학교육의 현주소다. 과학자가 어떤 과정과 어떤 사고방식으로 그 결과를 얻어냈는지를 배우는 게 진짜 과학 교육이라는 말에 백번 공감했다.

분명 과학적 지식은 일상생활에서 얻어지는 지식과는 크게 다르다. 의식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개선하고 앎을 종횡으로 증폭시켜왔다. 하지만 외눈으로 앞만 보고 달려서는 곤란한 일이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많은 사실을 수집하고 그에 기초해 어떤 이론을 도출하거나 법칙을 찾아내는 벌과 같은 일을 하는 과학과, 자기 자신의 몸으로부터 뽑아낸 논리를 가지고 복잡한 그물을 만드는 거미와 같은 철학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세분화되어 과학자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 외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과학 스스로 모든 것을 정의하거나 정당화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가져올 위험이나 윤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과학철학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 보인다. 과학의 세분화는 과학과 자연, 과학과 사회 등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나 자연 환경에 대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수도 없게 만듦으로써 지구의 생명들은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기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깊이 몰두하고 연구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노력하는 방법론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삶과의 문제이다.

격물치지에서처럼 과학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닌,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삶의 문제와 연결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성으로 시작하고 사실성으로 끝나는 단점을 극복하고 과학이 지니는 당위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삶을 위한 것 이어야 할 때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고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맞닥뜨리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하나 아쉬웠던 점은 과학이 안고 있는 위험과 윤리적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뇌신경과학이나 로봇, 유전자와 세포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데까지 과학이 와버렸는데도 그 문제를 간과하였다.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는 다원주의적 과학이 풀어가야 할 과제임에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논란에서 살짝 비껴선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과학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우주 프로젝트니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니 하는 거대과학은 더욱 더 과학기술에 힘입어 위험을 증폭시키고 있다. 자연재해에 따른 위험이 아니라 과학이 발달함에 따른 만들어진 위험이다.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 방법에는 다각적인 비판과 대안의 전략이 필요하다.

 

대안의 하나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있다.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과학의 질주에 과학철학과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들이 공익을 도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과학의 질주를 막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참여하는 과학, 과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겸비한 과학철학, 인문학적 지식은 소통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필수 요건일 것이다.

과학의 마지막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의 이론’이나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연구가 우리 삶에 어떠한 당위성을 가져다 줄 것인가? 실제로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다 보면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대안이 교차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견제되기도 하고,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음으로써 과학은 비로소 외눈이 아니라 두 눈을 가지고 온전하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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