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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앞에서 서성거리다

[영화] 송곳니

by 나?꽃도둑 2021.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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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영화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리스 영화감독의<송곳니>는 매우 특이한 영화다. 영화 자체가 독재에 대한 우화, 혹은 거대자본과 권력에 대한 신랄한 은유로 가득하다. 

<송곳니>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높은 담장과 그들이 교육 받는 언어다. 담장은 자유의 한계이고 언어는 세뇌이자 인식의 틀로 작용한다. 담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특이한 것은 이들에겐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체로서의 변별성을 획득하는 술어도 갖지 못한 채,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진다. 몸은 다 큰 어른이지만 어린아이마냥 순수한 본능과 무지만 표출될 뿐이다. 욕망도 수치심도 없이 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오빠의 섹스파트너인 크리스티나의 성기를 (이들은 키보드라 부른다) 핥고, 카빈총(하얀 새)을 사달라며 아버지의 손등과 가슴을 핥는다. 폭력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온순한 고양이를 무서운 악마로 인식하고, 근친상간을 해도 수치심을 모른다. 세 명의 자식들은 제공 되어진 혹은 교육되어진 인식의 틀로만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은 현실과 영화 속 현실에서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는 듯, 또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중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산다고는 하지만 실상 거대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아주 한정된 자유, 허용된 자유만 누리고 살고 있다. 더 면밀히 말하자면 소비의 자유와 소극적 자유만 우리에게 주어진 셈이다. <송곳니>에서 가족들이 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며 누리는 자유와 행복은, 실상 우리가 사는 모습의 은유이자 축소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세 명의 자식은, 아버지가 제공해준 모든 것에 만족하고, 복종하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여기서의 엄마의 역할도 눈여겨 볼만 하다. 밖에 있는 아버지와의 유일한 통로인 전화기를 숨겨놓고 일상을 보고 하는 염탐꾼이자 동조자이다. 또한 길들일 아이를 생산해내는 협조자인 셈이다.

 

 

 

그러다가 큰딸은 세상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간다. ‘부루스’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자신의 송곳니(야생성)를 빼버리고 아버지의 차 트렁크 속으로 숨어든다. 큰딸은 권위에 대한 도전, 공유된 행복과 평화를 깨는 변절자로 거듭난다. 사라진 딸을 위해 대문 앞에서 나란히 꿇어앉은 가족들이 개 짖는 소리를 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대문이 훤히 열려있는데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의심조차 하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저하게 길들여져 개 훈련의 5단계를 보여주는 그들이 보여주는 언어와 행위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어질 뿐이다.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고 사라진 큰딸은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보고 눈을 뜬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딘가에도 포섭되지 않는 삶, 권위에 침을 뱉을 줄 알고, 도전할 수 있는 정신을 큰딸의 송곳니를 통해 잘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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