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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앞에서 서성거리다

[영화] '두만강', '댄스타운'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

by 나?꽃도둑 2021.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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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영화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공간과 시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 (약칭 이만갑) 를 본 적이 있다. 탈북과 북송으로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정착하기까지의 눈물겨운 과정을 들려주는 탈북미녀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북한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중국 땅에 닿기도 전에 익사나 동사, 총에 맞거나 굶주림으로 죽는다고 한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중국이나 동남아 일대로 숨어들어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망명을 꿈꾸며 살고 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중국 동포와 북한 동포의 연민과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 <두만강>과 한국에서 새터민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 탈북자를 담아낸 <댄스타운>은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공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한정적인 삶을 사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인간의 삶은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과, 우연과 개연, 필연의 사건과 상황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삶을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함경도와 중국의 연변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 인근에 자리한 조선족 마을에서 탈북자들로 인해 그들의 삶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다룬 장률 감독의 <두만강>과는 달리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은 복잡하고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서 고단한 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속에 던져진 리정림이라는 여성 탈북자의 삶을 담았다. 이 두 영화를 놓고 보자면 공간적 배경이나 사회적, 정치적, 자연적 조건 중 어느 하나 비슷한 점은 없어 보인다. 굳이 유사점을 찾자면 탈북자들에 대해 애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두 영화는 다르다. 하지만 두 감독의 시선과 문제의식은 느닷없는 상황에 피투성이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의 이면에 가닿아 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조선족 마을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자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또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해준다. 두 편의 영화는 묵직하게 삶을 담아냈고, 그저 담담히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공간은 삶의 조건을 구성한다고 하였다. <두만강>에서의 조선족 마을은 탈북자들이 거쳐 가는 공간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북한을 벗어난 해방과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제 잡혀서 끌려갈지 모르는 중국 공안의 감시와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야 하는 불안의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공간에서의 주인은 연변 자치주 조선족 마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온 북한 사람들로 인해 그들이 받아야 할 상처와 피해는 삶의 존재 기반을 흔들고 삶의 질서를 마구잡이로 흩트려 놓는다. 탈북 하고자 하는 북한 사람들에겐 두만강은 생명의 강이자 희망이지만 중국 연변 조선족 사람들에게 두만강은 한탄의 강이자 증오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을 피폐화 시키는 존재들이 출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만강
두만강
두만강

<댄스타운>에서의 정림(라미란)이 정착한 대한민국의 한 도시는 고층 빌딩과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화려해보이지만 그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북한과는 달리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보다 돈이 주인인 셈이다. 높은 빌딩과 화려함으로 불야성을 이루어도 그것은 돈을 가진 자들의 것이지 힘들게 사는 서민의 것은 아니다. 집어등을 향해 몰려드는 오징어 떼처럼 돈과 향락을 향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면에는 처절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소통의 부재와 외로움의 실체를 <댄스타운>에서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낙태를 하려고 알 수 없는 약을 사서 먹고는 하혈을 하는 여고생, 일하느라 그런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엄마, 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가 된 남자, 국정원 여직원 수진 삶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햇빛이 반짝이는 수면 위와는 달리 온갖 잡다한 침전물로 뒤엉킨 물속처럼 그들의 삶은 누군가 흐려놓지 않아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만큼 암울하고 힘겨워 보인다. 그러한 공간으로 정림은 던져진 것이다. 정림에게 높은 빌딩과 혼자 사는 넓은 아파트와 물질의 풍요로움과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담겨지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위태롭게 흔들리게 할뿐이다. 정림은 결국 남편이 총살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혼자만 살아서 왔다는 죄책감으로 구토와 오열을 한다. 그러다 삶의 의미마저 상실하고는 자살기도를 하는데, 정림에게 있어 대한민국의 화려한 도시는 낯설고 허망한 공간일 뿐이다.
 

댄스타운

 
온도의 차이에 대해
 
바람이 분다. 도시의 외곽에 자리 잡은 도로변 갈대밭에서, 한 소녀가 본드를 마시고 그대로 뒤로 쓰러진다, 낙태를 하려던 여고생이다. 그때 그 앞으로는 즐겁게 웃으며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고 서너 명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맑고 투명한 햇빛 아래서 삶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보인다. 빽빽하게 들어찬 갈대숲에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 안에서 여고생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댄스타운>의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군중 속에 있어도 홀로 서 있는 나무처럼 외롭고 힘겨운 사람들이다 그 외로움과 허망함은 친근함으로 교묘히 위장되어 나타나지만 정림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림이 일하는 세탁소에 가끔 오던 경찰에게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 겁탈을 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기름처럼 겉돌다 손목을 긋고 자살기도를 하는 정림, 삶의 빈틈으로 차올라오는 냉기를 이기지 못해, 목을 매고 자살하려던 장애인 남자, 본드를 하며 쓰러지던 여고생, 독실한 크리스찬인 수진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에게는 따뜻한 삶의 온기라곤 없다. 교회 사람들의 보살핌이나 세터민 끼리의 관심과 교류는 삶의 표면을 데우기에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삶의 깊숙한 곳을 데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도 시간은 참으로 능청스럽게 흘러간다. 비참한 가운데서도, 죽음 앞에서도 삶은 계속되니 말이다.
 

댄스타운 포스터

 
생을 겨우겨우 끌고 가며 휘청거리며 사는 <댄스타운>의 사람들과는 달리 <두만강>의 사람들은 단단하고 뜨겁기조차 하다. 자신의 남편이 혼자 사는 두부 집 여자와 바람을 피운 걸 알게 된 촌장 집 아내는 길에서 만난 두부 집 여자의 따귀를 가볍게 몇 번 때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충고하는 것으로 응징을 하고, 상점 집 남자는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채 트럭에 탈북자들을 숨겨 도와주고, 열두 살 창호와 벙어리 누나 순희 그리고 할아버지는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덜어내고 나눠주며 진심으로 껴안는다. 밤에 다급하게 문을 두드린 탈북자에게 기꺼이 담요와 먹을 것을 내어주던 창호네 가족은 그 일로 삶이 뿌리 채 흔들리지만, 후회하거나 대놓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탈북자에게 순희가 겁탈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되고, 창호가 북한 친구인 정진이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 건물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비극이 빚어지지만 누구 하나 소리를 지르거나 호들갑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탈북자들을 돕다가 중국공안에 잡혀가던 남자도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에도 변함이 없다. 그저 일어난 일에 대해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들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들처럼 비극 앞에서도 그들의 태도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영화에서 무엇을 보든 지리멸렬함과 싸우는 작은 영웅들의 삶은 분명 위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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