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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앞에서 서성거리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by 나?꽃도둑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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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칸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자 남우주연상을 안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일본에서 있었던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실제의 이야기는 훨씬 더 비참하지만

영화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의 삶을 보여준다.
엄마는 열두 살의 첫째 아키라와 마치 둘만 이사온 것처럼 집주인에게 말한다. 셋째 시게루와 막내 다섯 살 유키는 여행용 가방에 숨겨서 이삿짐인 것처럼 들어오고 둘째 쿄코는 밖에서 기다리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온다.

다같이 모여 즐겁게 저녁을 먹는 장면에서 엄마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투정부리듯 "엄마는 행복하면 안돼?"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 아이들만 남겨둔 채 몇 주씩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마다 아키라는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를 기다린다.  학교에 가는 또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아키라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학교에 보낼 생각이 아예 없다.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그러다 엄마는 또 다시 집을 나간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돌아오겠다는 메모와 약간의 돈을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아키라는 동생들을 돌보다 돈이 바닥이 나자 엄마의 애인이었던 남자를(아키라의 아버지인지..)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아주 조금의 돈만 받고 돌아온다.
엄마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활비는 바닥이 나고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집에서 아이들은 점점 지쳐간다. 그러다 막내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아키라는 우연히 알게 된 누나와 유키를 여행가방에 넣어 유키가 보고 싶어했던 비행기가 지나가는 강가에 묻어주고 돌아온다.
그리고 아이들의 삶은 다시 시작되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섣부른 동정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보고 느끼는 건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네 남매의 상황을 덤덤하게 그려냄으로써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은 생명들이 얼마나 강한지 절망 가운데서도 살아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를...
마지막 장면인 아이들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를 알고자 나는 떠나지 못하고 영화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잠깐 상식!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은 1988년 일본도쿄도 도시마구의 한 주택에서 벌어진 아동 방치 사건이다. 네 자녀의 어머니가 아버지도 없이 자녀들을 집에 둔 채 수년간 가출한 상태에서, 금전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육아 포기 상태에 두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 국내는 물론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개봉되기도 했다.

사건을 자행한 어머니와 네 자녀의 성함은 지금까지도 알려진 바 없으나,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장남', '차남', '장녀', '차녀' 등으로 호칭하도록 한다

배경

1973년 무렵 장남 (첫째)이 태어났고, 1979년에는 장남의 아버지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이후 장남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취학통지가 오지 않자 어머니가 관공서를 방문, 아버지가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다.

1981년에는 장녀 (둘째)가 태어났으나 이후로 아이는 집에서 출산하고 출생신고 역시 하지 않았다. 1984년경에는 차남 (셋째)가 태어났지만 병으로 사망하였고, 시신 처리를 고민한 어머니는 비닐로 싸서 악취제거제와 함께 박스에 넣어 벽장에 두는 방법을 택한다.[1] 이어 1985년경에는 차녀 (넷째)가, 1986년경에는 삼녀 (다섯째)가 태어나 네 아이를 두게 되었다.

1987년 가을 무렵 어머니는 남자친구와 동거하기 위해 첫째에게 현금 5만 엔 (당시 환율로 28만 원)을 주고는 동생들을 잘 돌봐달라고 맡기고 집을 나섰다. 이후로도 송금을 하는가 하면 가끔 모습을 비추기도 하였다.

발견

1988년 4월, 삼녀 (당시 두 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장남과 함께 노는 친구들이 화가 나 옷장 위에서 몇번씩 떨어뜨리는 폭행을 가했고, 삼녀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7월 17일에는 집 주인이 불량배들의 집합소가 되어있다고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스가모 경찰서 직원이 아파트 방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장남 (14~15세?)과 장녀 (7세), 차녀 (3세)의 세 아이가 방치되어 있는 광경과 백골화된 유아 (차남)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을 돌봐야 할 부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견 당시 장녀와 차녀는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음날 복지원에 넘겨졌다.

당시 경찰은 장남을 조사하며 상황파악에 나섰지만 애매한 점이 많았고, 장녀의 진술을 통해 장남이 동생을 돌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추측을 세웠다. 또 장남은 낮에는 놀고 있는 날이 많았는데,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어른들이 "너 어느 초등학교 다니니?"라 물을 때마다 항상 "릿쿄 초등학교"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어머니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지도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편의점의 도시락 같은 정크 푸드로 하루하루를 때웠기 때문에 영양 실조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로 아이들의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론에 보도되었다.

7월 23일, 우연히 TV 뉴스를 보다 사건 소식을 접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자진 출두하였다. 경찰은 어머니의 진술을 통해 9개월 전에 집을 나왔으며 삼녀 (셋째)가 실종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25일 장남의 증언을 통해 삼녀는 장남의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고, 시신은 지치부시의 어느 덤불에 유기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1988년 8월 어머니는 보호책임자 유기치사 혐의로 체포 및 기소되었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장남 역시 삼녀의 사망에 관여하였다고 보고 상해치사 및 시신유기죄로 도쿄 가정법원에 송치되지만 상황을 고려해 고아원에 보내졌다. 3년 후 어머니는 출소하여 두 딸에 대한 양육권을 부여받았다.[2] 고아원으로 보내진 장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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