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하얀성>은 우선 소설적 기법에서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씌어진 이야기(필사본)속의 (푸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화자가 그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마지막 장에 가서는 화자가 나에서 호자로 바뀐 것인지 그대로의 나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작가인 파묵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였다. 이건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표지 그림 에스허르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소설 속 화자와 지적 두뇌게임을 한바탕 벌이라고 복선을 깔아 놓았는데 진정한 자아와 타자를, 동 서양을. 혼재된 문화를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독자가 대답할 몫인 것이다.
정말 좋은 작가는 높은 지적 수준과. 통찰력, 상상력, 문제의식과 자기만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파묵의 소설을 읽으면서 왜 그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해 엄청난 독서와 글쓰기를 병행한다고 했다. 독서야 말로 무수한 타자와 만나기인 것이다. 거기서 동질성과 이질성을 함께 겪으면서 선택적으로 받아 들이게 된 모든 것들로부터 '나'라는 고유성을 확보해 나간다. 파묵은 그 과정을 누구보다도 혹독하고 치열하게 겪었다고 보아진다. 이것이야 말로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터키 사람으로서 가지는 문제의식인 동시에 세계관인 셈인 것이다.
파묵은 작가후기에서 <하얀성>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발견된 필사본'의 역사적 사실 위에다 상상력을 입혀 지킬과 하이드 박사처럼, 사람들이 곧잘 헷갈려 하는 쌍둥이의 동질성처럼, 헤겔을 연상시키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관계와 긴장감을 소설의 기본요소로 잡았다고 했다.
결국 나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둘은 외모만큼 내면도 서로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의식이 외부에 있는 대상을 탐구할 수 없다면 자기 의식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헤겔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부로 들어온 모든 것들(타자)로부터 영향을 받고 다시 걸러서 출력되는 시스템을 가졌음을 생각해볼 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자아 속에 무수한 타아가 함께 공존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얀성>에서 작가는 동서양의 차이를 둔다는 것도, 학문의 우열을 둔다는 것도, 문화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도 우매한 짓임을 말하고 있다. 하얀성이 결코 정복될 수 없었듯이 문화라는 게 그렇고 인종이라는 게 그렇고, 학문이라는 그렇고.....온통 그런 거 투성이라는 것으로 읽혔다. 파디샤의 입을 통해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고 모른다."라고 암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 나라가 살아 남으려면 가장 한국적이어야 한다고 한 역설적 표현을 생각해 보면 파디샤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파디샤의 역할이다. 그의 중재자 역할을 영리한 독자라면 벌써 눈치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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