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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아내가 결혼했다 -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

by 나?꽃도둑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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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아내가 결혼했다

동정 없는 세상, 새는의 작가 박현욱의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중(二重) 결혼을 하려는 아내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남편의 심리를 흥미진진한 축구 이야기와 결합시킨 소설이다. 2008년 개봉 예정...

www.aladin.co.kr

  박현욱은《아내가 결혼했다》로 제 2회 세계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거액의 상금을 받은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금기를 다룬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나온 지 보름만에 11쇄를 찍었다. 우리 문학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소설에서 사실, 축구 이야기를 쏙 빼고 읽는다면 독자들은 적잖이 불편하고 심드렁했을 것이다., 또한 3류 소설로 전락할 소지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을 전공한 작가는 영리했다. 인류학, 성과 사랑학, 사회학을 들먹이며 주인공들의 의식과 행동을 축구를 하듯이 재미나게 스피디하게 풀어 나갔다.

 결국 이 소설에서 키워드는 축구와 섹스다. 인간의 섹스는 곧 사랑의 역사요 사회학이다 라고 박현욱은 말하고 있다. 성 모랄이 결혼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이며 남성적 시각에서 행한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에 대해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문체로 풀어냈다.
독자는 마치 축구 월드컵을 관전하듯 흥미롭고 아슬아슬함을 느낀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우선 불륜이나 일탈에 관한 것이 아닌, 법적인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또 결혼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현실은 소설을 앞질러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남편이 둘인 여자가 있을까 를 생각해 봤다. 아니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일까 를 생각해 봤다.

 세상에 이렇게 발칙한 여자가 있나? 양손에 떡을 쥐고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리얼리티가 떨어져서인지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온전히 소설로만, 그것도 판타지로만 읽힌다. 더러는 충격일 수도, 비도덕 운운하며 쓰레기 취급을 할 수도 있는 논쟁적인 책이지만 어차피 소설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선 욕망의 문제인 것이다. 욕망 들여다보기를 통해 반성과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그 본령인 것이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를 하는 부분이 예술을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술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한다." 고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솔직히 답해보자. 인아는 악녀인가? 아니면 솔직하고 용기있는 여자인가? 여자의 바람기와 남자의 오입은 본성이다 라고 어느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아는 본능에 충실한 여자인 셈이다. (뭐? 이성으로 꽉꽉 눌러야했다고? 그건 이미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지) 어쨌든 인아는 솔직하고 당당하고 뻔뻔하고 합리적인 여자다. 재경도 그런 점에서 한치도 뒤지지 않는다.
"제도라는 거 인간이 만드는 거잖습니까,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제도일진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라고 덕훈에게 말한다.
"폴리아모리, 다자간 사랑이라는 건데요 독점욕이나 질투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가능합니다."라고 (글쎄? 누구에게나 맞는 이야기는 아닌 듯~)
두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펼치며 자신의 삶에 책임지려는 의지가 분명한데 비해 덕훈은 그저 끌려 다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상황에 끼어 맞추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준다.

 모노가미, 폴리안드리(일처다부제), 폴리기니(일부다처제), 시리얼 모노가미, 집단혼 등 여러 형태의 결혼 생활을 영위해오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굳어진 건 이미 오래되었다. 하지만, 인간사 새옹지마요 요지경속이라 상식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결국 결혼이란 제도는 농경사회와 더불어 재산보존과 성의 독점으로 이어진 남성 중심적인 제도였음을 돌이켜 볼 때, 이에 반기를 든 인아는 사랑의 투사요 제도권에 대항하는 도전자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맞서 자신의 몸에 대해 주체성과 자율성을 선언한 혁명가이다. 그야말로 황당한 악녀인 셈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인아 라는 여자가 부럽다. 그 용기가 부럽고 당당함과 뻔뻔스러움이 부럽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죄짓지 않은 자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결국에는 미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겁니다."
재경의 이 말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하면 오버일까?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규정되어지고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다. 산다는 것은 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결혼 형태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제도와 관습보다 인간의 행복권, 또 인간 관계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동의하여 결정한 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 말이다. 성의 특성 중 하나가 독점욕인 그것을 극복하고 다자간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폴리안드리든, 폴리기니든 가능할 것이다. 성적 질투심이 없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가족이란 구성원은 지구상에 얼마든지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성의 문란이 곧 사회의 악임을 규정지은 이래 많은 국가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단속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랬다. "내 아랫도리를 왜 국가에서 관리하느냐고." 고 하지만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어제의 악이 오늘에 선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혼이 범람하고 시리얼 모노가미(여러 번에 걸쳐 이혼 결혼하는)와 섹스리스 부부들과 평생을 독신으로 늙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 속에 우리는 놓여있다. 우리는 제도권 안에 살면서 제도권을 서서히 바꾸어 가는 모순적 존재들인 것이다. 박현욱의 소설은 그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다만 그가 영리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먼저 알고 표현한다는 것은 기득권을 확보하는 행위다. 그는 적절히 축구얘기에 빗대어 무거운 주제를 슬며시 축구공 위에다 올려놓았다. 이 이야기가 자신에게 왔을 때 뻥하고 라인 밖으로 차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리저리 굴려가며 골대 안으로 골인시키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성적 취향은 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조심스러운 것이므로 타인의 조롱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를 해치는 악이 아닌 이상은.

 나는 이런 류의 센세이션한 내용의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조심스런 점이 있다. 함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과 마음을 가지고 문제의 핵심을 보려는 자세를 요하는 책읽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이미 세상에는 상식적이고 교훈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넘쳐난다. 물론 추하고 악한 것도 넘쳐난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박현욱의 소설은 중간 어디쯤엔가 있다. 빛 뒤에 낮게 드리운 그늘과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동터오는 언저리 어디쯤에 있다. 우리는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연애의 형태든 결혼의 형태든 가족의 형태든 인간의 본성과 욕망과 관계되는 문제이다. 낭만적 사랑만이 존중받고 이해되어야 하는 건 누구의 논리인가? 사람의 '관계'가 더 중요한 합류적 사랑이 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왜 배제시킨 것일까? 육체적인 욕망이 끝나는 곳에서 정신적인 욕망이 시작한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결국엔 육체적인 욕망으로 귀결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억압되지 않은 성, 자율성과 책임성과 공평성이 공존하는 합리적인 것이 우리 인간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가 에로스 시대였다면 중세의 사랑관은 아가페였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 매춘이 성행하던 시대였다. 제도화된 결혼을 보충하는데 유곽은(매춘굴)은 학교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귀족과 성직자는 에로틱한 장면으로 방을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고, 하이힐의 발명이 있었던 바로크시대는 여성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예의범절의 시대였지만 방탕과 사랑의 이론화가 지배했던 시대이다. 과거의 공개적인 성은 간접적이고 암시적이며 추잡한 행동으로 변모되었으며 이중 도덕이 자리잡은 시대였다. 채찍 최음제 향수 등 성욕화가 이루어진 시대였고 이 시대 유럽의 인구가 여섯 배나 증가한 사실만 놓고 보아도 도덕을 내세운 제도권 속에 꽁꽁 묶어 둘 수 없는 게 인간의 본성(욕망)임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만 알 수 있어도 우리 인간은 우리의 본성을 덮어놓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에 대해 색안경을 벗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거, 폴리안드리든 폴리기니든 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과 희생이 따르는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혼은 일상이므로 환상이라는 것은 이미 걷어진 상태다. 과연 재경과 나 덕훈 그리고 인아와 딸 지원이가 순풍에 돛 달 듯이 순항을 할 것인지...물론 그건 그들의 몫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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