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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올린 에세이

지하철 에피소드 1

by 나?꽃도둑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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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앞 전동 칸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거의 튕겨져 오르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는 문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영문인지 누구에겐가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쩌릿한 느낌과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빨리 문 열어요”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시선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로 들락거렸다. 누군가가 문을 열던 그때 전동차가 정거장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 승객의 휴대폰 배터리가 폭발하여 소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해져 잠시 혼란이 있었으니 이제 안심하여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동차에서 우르르 내려 다음 열차를 기다리거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경험은 마치 맑은 물에 붉은 피가 번지듯, 몰려오던 사람들 뒤에 있던 실체 없는 공포에 대해 상상력이 더해져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웠다. 그 짧은 순간에 칼을 든 미친 남자를 떠올렸던 것은 왜였을까?

 

 

2

눈을 감았다. 전동차가 속력을 내는지 몸이 붕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몸은 열차가 가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겠지 생각하니 조금 섬뜩해졌다. 땅 속을 헤집고 다니는 파충류 전동차의 내장이 된 기분이었다.

 

 

3

나는 외계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구인들의 아침 출근 풍경은 참으로 기이하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게슴츠레한 눈빛과 처진 어깨를 실록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아 버린다. 그들에겐 밤의 긴 꼬리를 자르지 못했는지 간밤 꾸었던 꿈이 묻어 있고, 술자리의 여운이 남아 있고, 애인의 키스 자국이 남아 있다. 오늘 아침에는 전동차 한쪽 구석에서 한 젊은 여자가 끅끅대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4

야호~ 오늘은 땅 속을 미친 속도로 달리는 은하철도 999의 새로운 모델에 탑승하는 날이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스위스에서 노르웨이로 날아가던 여객기와 우주 관광객을 실은 은하철도 999의 끔찍한 충돌사고 이후 세계의 정상들은 한 자리에 모여 오직 비행기만 하늘로 다닐 수 있는 합의문에 서명을 했다. 그 후 은하철도 999는 수많은 논의를 거쳐 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제 얼마 있으면 그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5

30대의 한 남자가 다섯 살 난 딸과 아내가 보는 앞에서 달려오는 전동차에 몸을 날렸다. !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린 딸과 아내의 가슴 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갔다. 곪아 터지고 아물고 다시 곪아 터지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아물지 모르지만, 죽음 앞에서 삶이 능청스러워질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할지 모를 일이다. 죽은 자보다 산자의 손끝 마디마다 전해질 고통이, 가는 곳마다 무겁고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녀야 하는 모녀의 삶은, 죽은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무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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