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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올린 에세이

시 한편 읽고 가실게요~~

by 나?꽃도둑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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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골드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ㅡ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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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가만 돌이켜보면 우리 집에 와서 죽은 것들이 너무 많다.

잘 키워보겠다고 데려와서 제대로 돌보지 못해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갈증 때문에 식물이 죽어갈 동안 나 역시 배부르게 밥을 먹고 있었고, 히히덕대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겠지..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가 시를 통해 알았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곧 세상을 대하는 자세라는 것을.

 

그래서 시인인가?...그 순간을 감지하고 죽음과 삶을 성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가끔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의 잣대가 될 때,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여길 때

누군가를 딛고 올라선 자리에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

 

행복이란 이런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겠지...

누군가의 희생과 불행이 나의 행복을 능청스럽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각없이 살고 있는..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저급한 부류의 인간들의 논리가 아니던가,

 

한 편의 시는 우리 집에서 사회로,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다.

나는 시 한 편이라도 잘 키워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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