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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올린 에세이

내가 조언하는 방식에 대하여

by 나?꽃도둑 202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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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학교 정원에 핀 접시꽃

 

가끔 주변 사람들은 내게 조언을 구해온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진지하거나 심각하거나 결정을 못하거나... 아무튼 이유는 다양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혹은 툭 던지듯 가볍게 대답을 주긴 하지만 결정 만큼은 나를 힘들게 한다.

나 역시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일에까지 결정을 해야 하다니, 이건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기가막힌 방법을 터득해냈다.

 

어느 날 동료가 동창회가 있다며

거울 앞에서 자켓의 단추를 풀었다 잠갔다 하면서 한참을 이리저리 보더니 물었다.

 

 " 단추를 잠그는게 나아요? 아니면 푸는 게 나아요?"

 

그래서 나는 대답해줬다.

 

 "왜요? 고민되요? 갈 때는 잠그고 시간이 좀 지나선 풀고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동료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또 거울 앞에서 모자를 이리 저리 써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또 어딜 가나보네...' 생각했다.

동료는 내가 뒤에 있는 걸 알고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이것도 이쁜 거 같고...뒤집어 쓰는 것도 이쁜 거 같고... 아, 결정을 못하겠네... 어때요? 어느 쪽이 나아요?"

 

그래서 또 대답해줬다.

 

 " 갈 때는 창이 없는 쪽으로 쓰고, 가서 한참 지나서 돌려 쓰세요. 그러면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여 줄 수 있잖아요."

 

근데 나는 왜 이럴까? 니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한 황희정승에 빙의한 것일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두 가지 다 좋다는 편의주의에 안도하고 흡족해 하니 말이다.

하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므로 반성할 일은 아니다. 

그냥 웃고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켠에선 개운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분법적인 사고에 길들여져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가장 듣기 두려워하는 단어 중 회색분자, 회색인간이 있다.

더보기

회색분자라함은 소속이나 정치적, 사상적경향, 노선 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두고 생사가 엇갈리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알게모르게 이분법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았다.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사고의 습성, 행위의 습성을 학습하고 고착화 시켰다.

지금 중고생들만 봐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튀면 안 된다. 누가 깻잎 머리를 하면 죄다 하고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으면 죄다 입게 되고,.,(아 입 아프다...)

아무튼 몰개성이 미덕인 사회이다.

 

그러니 기가막힌 방법을 생각해냈으면서도 뭔가 불편한 것은 

편의적이고 잔꾀만 부리는 사람으로 오해를 살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모르겠다.

뭔가 분명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사람,

자기결정이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사람,

잔꾀로 인해 위기모면에 강하고 기회에 강한 사람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나도 싫어하는데....

 

내가 조언하는 방식에 대하여

웃다가도 서늘해지는 이유가 아, 어쩌면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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