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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올린 에세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

by 나?꽃도둑 2020.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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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하이선이 지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륙을 강타하지 않고 동해로 빠져나가 막대한 피해를 면했다는 점이다. 그러고보니

열흘 사이에 세 번의 태풍이 발생했다.  

바비, 마이삭, 하이선에 이어 태풍이 또 온다고 하니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다.

태풍 때 겪게 되는 온갖 파손과 산사태 ,침수는 막대한 재산피해와 인명 피해로 이어지곤 하는데
부디 가볍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출근을 했다. 비바람이 조금 수그러들 때 집을 나왔는데
태풍이 지나간 거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간판은 떨어져 한쪽으로 기울고, 가로수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뚝 뚝 부러진 생가지들과 나뭇잎들은 비에 젖은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완전히 빠져 나가지 않았는지 태풍의 꼬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살랑 살랑거리다가도 후려치며 겁을 주곤 하였는데 다행히 비는 잠시 멈추었다.

시선이 나무에게로 갔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몸을 낮춘 나뭇잎의 물결이 한결 푸르렀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은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길을 내며 빠르게 달아나곤 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새로웠다.

매일 익숙하게 마주치던 풍경과는 다른, 일탈과 마찰과 부딪힘의 역동성으로 꿈틀댔다.

살아 있는 것의 숨죽임과

죽어 있던 것의 활동성으로

세상의 판이 뒤집힌 것처럼 낯설고 무질서해졌다. 

 

 

 

 

 

나는 문뜩, 쓰러진 나무처럼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야 그게 가능해졌다. 바로 서 있던 날들의 피곤함이 비로소 밀려왔다.

태풍도 불지 않는, 안온함과 지루함의 날들의 연속은 사람을 무기력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들곤 하는데

아, 가끔은 이런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을, 쓰러진 나무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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