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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책] 시의 힘 / 서경식

by 나?꽃도둑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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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알라딘 인터넷서점

 

나는 오랫동안 시를 읽어 왔다. 하지만 시집을 들고 언제나 절절맨다.

분명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시들을 만날 때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만두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끙끙대며 계속 시를 읽어야 하는지, 돈도 밥도 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매어두고 암호를 풀 듯, 보물찾기를 하듯 문맥 속에서 단어 속에서 허우적대곤 한다.

 

『시의 힘』을 펼치자 ‘얄따란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그 무게에 절절맨다.’는 첫 문장을 만났다.

시 읽기를 이보다 잘 표현한 문장을 만나지 못한 나는 설레었다.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온통 시 이야기로 충만할 것이라는 기대로 부풀었다. 하지만 시 이야기는 2, 3장에서만 다루고 있다. 제목이 내용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야 수긍이 갔다. 문학의 현실 인식을 통해 보편적 진실에 이르고자 한 그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재일 교포 3세인 서경식은 일본인이면서 온전하게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디아스포라의 삶과, 자신을 있게 한 시와 문학, 문학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시의 발견은 흔들리던 자아와 세계를 잇는 다리였던 셈이다. 어떻게 글쟁이가 되었는지, 문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견해를 총 8장에 걸쳐 풀어놓았다.

 

서경식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차별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처한 삶과 일본사회에 대한 시선을 내면화했다.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불을 붙인 건 고등하교 1학년 때 ‘제일교포 학생 모국 방문단’에 참가하여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다. ‘조국’, ‘민족’, ‘고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심하던 소년 서경식은 그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 했다. 여행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시로 풀어내 시집 <8월>을 묶어냈을 만큼 영민한 소년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목격자에서 증언자, 실천가로의 다짐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성, 주체성을 발휘하고자 고심한다. 그러다 서경식의 의식에 불을 지핀 건 서승과 서준식 두 형이었다. 형으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시인들의 저항시를 읽게 되었고, 루쉰, 프리모 레비, 빅터 프랭클, 에드워드 사이드, 프란츠 파농 등의 글을 접하면서 인식의 틀을 확장시켜 간다. 또 대학생이던 시절 학생운동과 함께 파시즘에 대항한 유럽의 지식인들의 정치참여를 보면서 서경식은 그들의 사상에 심취, 경도된다. 일본 사회 속에서 마이너리티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을 자기의 역할로 삼게 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 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이쪽과 저쪽은 어떤 모습일까? 아니 그보다 경계인 혹은 마이너리티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외와 차별을 동반한 삶이 아니더라도 예민하게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 어쩌면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자본과 기술, 패권주의로 인해 소외와 자기분열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들 모습이다. 소비중심적인 생활, 기계화 자동화 된 삶 속에서 몸으로 겪어야 하는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감수성도 메말라버렸다.

 

비인간적인 것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적 감수성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 저널리스트와 논픽션이 난무하는 시대에 시는 헛소리처럼 혹은 웅얼거림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또한 쏟아져 나오는 시집들이 문화 산업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한 문학평론가의 지적을 떠올리면서 나는 시가 자본에 변질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시는 그 자체로 시다. 시는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을 나는 믿는다. 역사적으로 시는 인간과 생명 존재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명상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해왔다. 시인들은 한 알의 모래알에서, 씨앗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곤 하였다. 시적 상상력, 시적 감수성이야 말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닐까……. 현실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지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근대시들이 근대에 저항하고, 폭압 받던 시대에는 폭압에 저항하였다. 시인은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에 대해 충분히 공감이 갔다.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시인이어야 하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자칫 모든 시인이 그래야 하고 모든 시들이 그래야 하는 걸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시나 문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나는 읽어냈다.

 

시의 무게와 힘은 사실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시가 함의하고 있는 감동이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수용하려면 우리의 마음 바탕이나 사고가 시적 상상력이나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적 상상력은 원시적 사고의 그림자이자 근본적으로 생태적이다. 서경식은 시적상상력에 대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6장에 있는 ‘아우슈비츠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잇는 상상력’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 증언 불가능한 것은 재현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상력, 비판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은 필요해 보인다.

 

시는 마음과 몸을 반응하게 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이다. 시가 태어나는 순간이 시대와의 불협화음이나 저항이 아니더라도 시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와 문학의 힘은 시대의 맥박을 짚고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시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고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마지막 변방에서 파멸로 가는 행위를 멈추게 하는 일일 것이다.

 

시는 시대에 따라 발휘되는 힘이 달랐다. 억압에 맞서 저항했던 시의 시대가 끝났다면 지금은 다른 병폐의 맥을 짚어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문학에 자신을 내던지고 바라보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 삶의 도구 중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문학으로 삶을 위무 받고 세계를 해석한다. 나 역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한다. 시를 통해 문학을 통해 생태적인 존재 조건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견디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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