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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앞에서 서성거리다

토리노의 말

by 나?꽃도둑 202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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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사탄탱고>를 만든 헝가리의 거장 벨라 타르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열번 째 장편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였다. 흑백필름의 영화로 한편의 서사시 같은 장엄하고도 독특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익숙하게 보아온 영화와 분명 구별되는 벨라 타르 감독만의 독특한 영화언어로 만들어졌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명상과 사유에 가까운 영화로 느리고 롱테이크가 특징이다.

 

1889년 토리노의 광장에서 니체는 채찍을 맞는 늙은 말에게 다가가 목을 끌어안고 발광한다. 영화는 그 때의 늙은 말과 마부, 그의 딸의 이야기이다.

총 여섯째 날로 이루어진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영원회귀의 사상이 잘 집약되어 있는 듯 ‘반복과 차이’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마부와 그의 딸의 일상은 여섯 째 날 동안 거의 반복적이다. 밖은 끊임없이 폭풍이 몰아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딸은 여러 겹의 옷을 아버지에게 입혀드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버지는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 딸은 물을 길어오고, 아버지와 딸은 말을 돌보고, 함께 감자를 먹고, 밤이 되면 각자 잠자리에 든다. 이 반복적인 일상 가운데서도 매일 먹는 감자의 크기가 다르고, 감자를 먹는 모습이 다르다. 이웃의 남자가 술을 가지러 오기도 하고, 지나던 집시들이 탄 마차가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가기도 한다. 늙고 병든 말은 아무것도 먹으려 들지 않고, 딸과 아버지는 가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 우물이 말라 물을 구할 수 없자 짐을 챙겨 말을 데리고 집을 떠나보지만 무슨 일에선지 다시 돌아온다.

 

 사람들은 일상이 늘 같다고 투덜대며 살아간다. 그냥 살아지는 것, 그저 견디는 것이라고 했을 때, 삶 자체가 가지는 비루함은 허무주의에 가 닿을 수도 있다.

 부녀가 보여주는 삶 역시 관조하며 견디는 삶에 가깝다. 거부하지 않고 그저 견디는 삶에서 시간의 흐름은 어둠과 빛의 선상(線上)에서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시간은 깜빡, 깜빡거리는 점멸등처럼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기도 하고, 안과 밖의 경계인 문을 여는 순간 빛과 어둠이 서로 교차되기도 한다. 단지 감자가 익는 동안, 빨래가 마르는 동안, 술병의 술이 거의 비워졌을 때, 우물이 말랐을 때, 등잔불의 불씨가 꺼졌을 때, 시간의 흐름은 조금 더 빠르게 소멸을 향해 달음박질치듯이 보인다.

 

시간을 느끼는 자, 그는 이미 생성된 자이다. 시간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또한 시간에 의해 소멸되어 가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반복과 차이가 없는 것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빛만 있는 세계, 어둠만 있는 세계는 정지된 세계 곧 종말인 것이다. 시간은 결코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몸으로 시간을 느끼며 살았다. <토리노의 말>에서도 부녀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뒷모습은 그걸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마지막 날에 카메라가 처음으로 밖에서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 딸을 보여 준다. 딸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때 화면 속의 딸과 마주한 느낌은 그들이 사는 모습의 구경꾼이 아닌,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 대 인간의 마주침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성했지만 소멸과 파멸의 운명을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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