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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올린 에세이

비 오는 날에

by 나?꽃도둑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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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 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시집 <비> 문학과지성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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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무렵부터 내린 비는 오늘 오후가 돼서야 그쳤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 내렸다. 마른 땅 위를 떠돌던 먼지도 잠잠히 땅으로 내려앉았고,

푸석하던 흙도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마른 나뭇가지나 풀잎마다 맺힌 물방울들은

투명 유리구슬처럼 조롱조롱 메달려 있다가 뒤따라 내린 비에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나도 시인처럼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본다.

비에 관한 추억과 명료한 기억들, 그리고 비에 관한 잡다한 생각들이 버스 차창에 사선을 그으며

내리던 빗줄기마냥 분명하면서도 어지럽다.

지상에서 증발된 모든 수증기는 물방울로 구름층에 머물러 있다가 지상으로 떨어진다는 소리인데

직선의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묻고 있지만 나는 물방울이 지상으로, 그 먼 거리를 뛰어내리면서 어떻게 직선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 구름층에서 툭, 하고 뛰어내리는 순간

길게 늘어진 물방울의 몸은 마치 구름속에 한 손을 집어넣고 한 손은 지상으로 뻗어 내린 것처럼 보인다.

순간의 일을 위해, 몇 날 며칠을 하늘로 올랐을 수증기의 고단한 여정을 두고 시인은

비는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임을, 그게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물의 이치와 존재의 이유를 비 오는 날 번개를 맞고 깨달은 시인은 모든 사물이 날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고, 수증기가 하늘로 증발되어 비가 되어 내리는 이유가

날기 위해서라면... 우리 인간은? 

인간은 날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게 조용히 하늘로 오르는 수증기가 되지도 못하고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지난한 과정을 겪지도 못하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것도 겪지 못하는데...

모든 걸 다 버리고 비우면 가벼워져 날기라도 할까?

아무래도 아낌없이 미련없이 부서지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인간 존재의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가도 이렇게 비오는 날 번개를 맞고 깨달을 수 있다면,

물 속에서 불을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벌거벗은 채 다리 밑에서 번개를 기다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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