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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말테의 수기 -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by 나?꽃도둑 2020.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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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릴케전집 1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 책세상 / 2000년 2월

 

말테의 수기

한 젊은이가 홀로 대도시 파리에서 보고 느끼는 체험과 사색 등을 기록한 릴케의 소설.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구성으로 존재의 불안이라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시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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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가 씌여진 20세기 초의 유럽은 그야말로 많은 것이 혼재되어 나타난 혼란의 시기였다. 성의 혁명이 꿈틀거렸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고조된 사회 분위기와 삶의 동화가 물결치던 시대였다. 그리스교의 전통이 폐기되고 유럽 각 국의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 농민과 장인 증가로 인해 가업이나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대감을 안고 도시로 몰려들지만 도시의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살기 위해 도시로 오지만 질병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비참한 생활을 이기지 못해 길바닥에서, 병원에서, 심지어 차안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말테의 하루는 그 모든 것을 파리의 거리에서 목격을 하고, 돌아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만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맙소사, 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 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 라고 기록한다. <말테의 수기>는 줄거리 전개 없이 일기, 편지, 회고록, 베네치아로의 여행, 사랑, 죽음에 대한 기록들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나는 누구인가' 에서 더 나아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기인 것이다.

루 살로메에 의하면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어린 시절의 부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집과 어머니와 르네로 살던 시절, 시종관인 브리게 할아버지의 죽음과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저 조각조각 단편적인 이미지와 개념으로만 남아 있던 것에 릴케는 주관적인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본질을 보려 애썼다는 소리일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커다란 것에 대해서도, 가면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릴케는 보는 것에 열중하고 죽음을 인간존재의 일부로, 커다란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피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의 진실된 내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거기서 발생되는 공포와 불안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나의 삶'을 인식하는 당당한 자아발견인 셈이다. 그야말로 삶의 한계인 죽음을 향해 가는 걸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런 자아발견인 것이다.

니체가 죽기 1년 전인 1899년 어느 거리에서 마부에게 채찍을 맞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고 울부짖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나 또한 <말테의 수기>를 끌어안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외치고 싶지만 제대로 이해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지루한 느낌이 든 문체가 첫 걸림돌이었고, 관념과 비유와 상징으로 나타난 문장이해가 두 번째 걸림돌이었다.
몰이해는 존재를 억압한다고 했던가? 니체가 끌어안은 말의 마부처럼 무작정 채찍으로 때리기만 했듯이 우매한 한 사람의 독자는 무작정 읽기만 했던 것을……. 이해는커녕 지나치게 예민하고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의문 투성이였던 말테를, 그저 특별한 사람으로 제쳐둔 채, 말은 달려야 한다 고 생각한 마부처럼 나 또한 그랬던 것을.

가끔 나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필시 예민한 천재였다면 그 문제를 풀려고 고군분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러다 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불안과 고독을 실존의 무게로 느끼고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테의 수기>의 저자 릴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고유한 것처럼.

나는 <말테의 수기>에서 눈여겨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1. 작품에서 거론된 '커다란 것'의 의미에 대하여

말테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열병에 시달리며 '커다란 것'에 대한 공포를 느껴 의사에게 '커다란 것'을 없애달라고 한다.  그 때 말테의 아버지는 그 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어린 말테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 말테는 같은 증상에 시달리게 되어 의사를 찾아가지만 정확한 병명을 듣지 못한다. 여기서 '커다란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알 수 없는 공포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것'에 대해 말테는 마음 속에 자라는 종양과도 같고 머리칼과도 같이 자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커다란 동물처럼 자기 안에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커다란 것' 이라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는 누구나 한 가지 쯤은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테가 보여준 태도처럼 인정하고 회피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때론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흔히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이용하여 자신을 현실로부터 격리시키거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살아간다. 실상 그 '커다란 것'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는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더 이로운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2.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내용 중 하나가 '본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단순히 일차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릴케의 문학 인생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두 인물이 있었다. 바로 루 살로메와 조각가 로댕이다. 르네라는 아명을 버리고 '라이너' 라는 이름을 갖게 해준 루는 릴케에게 있어서 '영혼의 문'과 같은 존재였다. 1911.12.28 루에게 보낸 릴케의 편지에 보면 '당신의 존재는 내가 처음 열고 들어간 문과 같았오.' 라고 씌여져 있다. 릴케는 자기보다 14살 연상인 루에게 사랑의 헌시를 바칠 만큼 루를 사랑했고 따랐다. 루와 함께 한 두 번의 러시아 여행은 릴케의 문학과 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한 사람 로댕은 릴케에게 항상 "일하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로댕은 6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쉴새 없이 대상을 관찰하여 다양한 각도에서의 세부 묘사와 새로운 형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예술가에 있어 일한다는 것은 곧 창작활동을 의미한 것이므로 그 태도에 대해 릴케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로댕은 비서로 있던 릴케에게 여러 곳을 다니며 대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개념이나 주관적 이미지로 대상을 보지 않고 조형 예술가처럼 철저하게 보면서 이해하려 들었고 본질을 보려 애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에서는 서정성이 거둬지고 사물의 객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사물시인 <신시집> <말테의 수기>가 이때 탄생하였다.

말테는 파리의 거리를 헤매면서 오직 본 것에 대해 집요하리 만치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의 삶을 인식해간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해요, 깨달음이요, 인정하는 행위요, 내면의 눈이요, 인식의 행위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맞게 규정하고 또는 부정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 객관성을 확보하는 일인 것이다.(주관적인 이미지와 개념을 뛰어넘어야 함을)

 3. 삶과 죽음의 대응관계에 대하여(말테의 문제의식)

<말테의 수기>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죽음'의 문제다. 시종관 브리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고유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요란스럽게 죽음을 맞는 과정을 떠올리면서 할아버지가 내부에 키워온 죽음은 할아버지만의 고유한 것이어서 그 어떤 죽음도 강요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즉, 죽음까지도 인간존재의 일부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목격하게 되는 죽음은 고유성이 없다. 죽음마저도 대량생산되고 기성품 같은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죽음에 대한 고유성마저 박탈당한 도시의 시민들, 말테에게 있어 그런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물며 개미의 죽음, 개의 죽음에조차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삶도 비참한데 죽음까지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다니! 그리하여 말테는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만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죽음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삶과 죽음은 공존하면서도 어느 한 쪽이 그 명을 다하면 자연히 어느 한쪽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소리일 것이다. 삶의 한계는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준다. 그리하여 죽음 해악과 삶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다.

릴케도 역시 그 문제에 직면했던 것 같다. 인간이라면 자기 죽음에 대해 방관할 수 없는 것이므로. 루가 밝혔듯이 릴케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이미지와 상징이 있었다고 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당당한 자아, 고통받는 자아, 불굴의 의지로 서 있는 자아와 무덤 속으로 사라질 두 개의 분열된 자아가 그것이다. 삶과 죽음은 릴케에게 있어 똑같은 무게로 그의 몸을 짓눌렀던 것이다.
말테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증거 해나간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끌어안는다.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이 사람도 내부에 죽음을 산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고유한 죽음을 끌어 안은 그의 삶의 자세에서 경건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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