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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함양의 이곳저곳

부산 초량 이바구 길을 걷다

by 나?꽃도둑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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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역 맞은편 골목에서 시작한다.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구 백제병원 건물이 나온다. 1922년 한국인이 일본에서 벽돌을 가져와 지었다는 5층 건물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이었다. 1932년에 병원이 문을 닫은 뒤에 봉래각이란 중국 요리집에서 일본 아까즈끼부대의 장교 숙소를 거쳐 해방 뒤엔 치안대사무소,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신세계 예식장으로 운영되다 1972년 화재로 건물 내 일부를 태웠으며 이후 5층 부분은 철거되고 4층 일반 상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는 1층에서만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카페는 공간을 그대로 살려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넓은 홀이 중앙에 있고 양 옆으로 또 다른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마다 탁자와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와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외벽은 화재로 인해 그을린 자국이 역력했다. 백 년 동안 일어난 일을 끌어안고 우뚝 서 있는 건물은 스산해보였다. 마침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백제 병원을 끼고 옆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명태고방이라고 불리었던 옛 남선창고 터가 나온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자 각지로 유통되던 물건을 쌓아두던 곳으로 지금은 붉은 벽돌로 만든 벽만 남아 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었고 일부는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천 평이나 가까운 그 너른 터에 전국 각지에서 온 물건과 몰려든 상인들과 일본인들, 광주리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 상투 튼 짐꾼과 지게꾼들이 활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복과 양장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데 섞이어 웅성거리는 말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다시 길을 돌아 나와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량교회가 나온다. 계속 이어지는 골목길은 나무줄기처럼 여기저기 뻗어 있었다. 참으로 숨 가쁜 동네였다. 서로의 어깨를 딛고 서 있는 곡예사들처럼 집들은 산등성이 오르막을 따라 층층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도로가 정비되고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공동 우물에서 물을 퍼 나르거나 똥지게를 지고 골목을 오르내렸던 곳이다. 비가 오면 흙탕물이 골목길을 따라 흘러내렸고, 눈이 내리고 난 뒤 얼어버린 골목길은 또 어땠을까……. 너 나 할 것 없이 사는 것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팠을 것이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산복도로를 따라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에 형성된 이러한 집들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대부분 국유지나 공유지였던 이곳에 판자촌이 들어선 것은 해방이 되던 해부터였다고 한다. 해방 전에 좌천동의 매립 공사 때에 일꾼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내렸지만 고향에 돌아갈 처지가 못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배가 들락거리는 부산항을 내려다보며 망향의 슬픔을 달래기도 하고, 골목마다 모여 고향에 대한 이바구로 꽃을 피웠을 것이다. ‘이바구라는 말은 이야기의 경상도의 방언인데 참으로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섞이듯 말도 섞이어 들린다.

 

해반 전후의 사진들이 걸린 담장갤러리을 지나면 동구인물사담장이 나온다. 동구를 빛낸 인물들의 사진과 간략한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장기려 박사, 개그맨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 등 익숙한 이름도 만날 수 있다.

오르막을 조금 더 오르자 보기에도 아득한 168계단이 나왔다. 지금은 엘리베이터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관광객들이 재미삼아 끙끙거리며 오르내리곤 하였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계단 바로 옆에는 공동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두레박을 이용해 물을 길어 올리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계단 중간쯤에는 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기다리는 마음>을 쓴 김민부전망대로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서니 영도까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바다를 끼고 빙 둘러선 산등성이마다 빼곡하게 형성된 집들이 부산항이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바다를 에워싼 집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망대를 거쳐 산복도로까지 갔다가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계단 근처에 있는 168식당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지붕으로 썼던 함석을 가져다 처마로 이어붙인 독특한 분위기의 식당이다. 간판은 없었고 입구에 얌전히 서 있는 메뉴판이 이곳이 식당임을 알게 한다. 할머니 세 분이 일을 하고 계셨는데, 사회복지법인체로 운영되는 곳이다.

도시락 정식을 시켰는데 노란사각 도시락에 밥과 시락국이 나왔다. 밥과 햄과 멸치조림 반찬이 섞이게끔 도시락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깔깔대고 웃다가 도시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음식이 정갈하고 싸고 맛있었다.

 

배를 채우고 난 뒤, 다른 길을 통해 산복도로까지 올라갔다.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엔 어딜 가나 익숙한 풍경들이 있는데, 낡은 의자들이 볕 좋은 곳에 놓여 있었다. 삼삼오오 마주 보고 있기도 했고, 나란히 놓여 있기도 했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앉아 이바구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누구네 집 자식이 어땠드라, 누구네 집 아무개가 병원에 입원했드라 등의 동네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식과 소문들의 이야기창고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우리 할머니도 살아 계실 적에 심심하면 골목 평상에 앉아 할머니들과 오순도순 이 얘기 저 얘기로 시간을 보내시곤 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살았고, 저마다 사연을 안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놨을까, 이바구길은 한 많고 서러운 사람들이 온정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면서 함께 해온 인생의 길이었다.

 

나는 골목마다 흘러넘쳤을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저 만치 골목을 뛰어 다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구두 통을 둘러메고 길을 나서는 까까머리 남자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올라오는 늙수그레한 남자, 길게 닿은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자른 수줍은 아가씨가 방금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바구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이바구공작소에 들려 봉제인형 두 개를 사고, ‘장기려박사기념관을 지나 유치환 우체통을 지나 가장 높은 오르막인 까꼬막까지 가는데 두 시간은 족히 넘게 걸렸다.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초량 이바구길은 산복도로 여러 곳에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곡진한 삶의 터전이 지금에 와서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것을, 이곳에 처음 흘러들어와 판자촌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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