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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채식주의자

by 나?꽃도둑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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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된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주일에 이삼 일을 통닭이나 삼겹살을 먹을 만큼 고기를 좋아하던 아이여서 믿기지 않았다.

“왜 갑자기 고기를 안 먹겠다는 거야?”

<채식주의자>에서 가족들이 영혜를 다그치듯이 나도 딸을 다그쳤다.

“그동안 동물들한테 못할 짓을 했어…….”

예상치도 못했던 딸의 대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고기 먹는 일을 그만둘 만큼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딸은 텔레비전에서 사육되고 도축되는 동물들의 실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고 그 충격으로 육식 관련 도서들을 찾아 읽었다고 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마나 갈까?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인데……하고 반신반의했다. 그냥 그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굳이 그러겠다면 말릴 생각이 없었다. 나 역시 초등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가 닭 목을 비틀어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고기를 먹지 않았기에 그냥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채식주의자를 선언한 뒤부터 딸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우유와 계란 정도만 먹었고, 가죽제품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정기적 기부자가 되었다.

 

영혜의 파국은 아홉 살 때 겪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다리를 물었고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개를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닌다. 아버지는 폭력의 직접적인 행위자로 그럴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딸의 다리를 문 개가 받아야 할 벌을 딸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응당 그렇게 죽어 마땅한 개였고 끓인 국을 맛있게 먹은 기억에서 영혜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꿈을 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꿈을 통해 도축과 살인은 동일시되고 죄의식과 공포는 그녀를 장악하고 만다.

영혜가 고깃덩어리 앞에서 느꼈을 공포와 구역감은 독백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동안 먹은 고기들의 목숨이 명치에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한 영혜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동안 못할 짓을 했어.” 라고 말한 딸 역시 간접적으로 행한 폭력성에 대한 고백이었음을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딸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통을 보지 않았다면 먹는 행위에서 자신의 폭력성을 감지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육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들은 유별난 걸까?

폭력의 직접적인 행위자가 되어 그것에 대해 응당 할 일을 했다고 여기는 영혜아버지와 같은 사람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윤리적 죄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어릴 적 겪었던 영혜의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꿈을 통해 깨어났고 현실은 산산조각 난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영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한 채 외톨이가 되어간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에게서 이해받는듯하지만 그건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 형부가 영혜에게 가지고 있던 욕망과 판타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혜가 고통스러워했던 지점과 육식으로 인해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는 원인과 동물들이 받을 고통에 공감한 딸이 느낀 지점엔 분명 접점이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진 세계와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이 모든 세계는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한 번쯤은 육식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는 음식에 대한 식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깨끗하고 부분적으로 포장된 고기를 사먹다가 가끔 재래시장의 식육점에서 형체가 그대로인 소나 돼지의 사체를 보게 되는데 섬뜩해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게 된다. 도축은 불편한 진실과도 같아서 그 과정을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먹는 일은 이미 폭력성이 내재된 행위이다. 생명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고기는 살해와 폭력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조용히 덮어두어야 평온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일 것이다.

채식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영혜의 남편이나 가족들은 사실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다. 영혜가 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이 자신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하는 자리에 우리의 얼굴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육식에 대한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함께 겪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식을 하면서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다만 육식 뒤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영혜의 고통이 나와는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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