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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인민의 탄생 - 무화한 몸짓으로 끝나지 않길 바랄 뿐!

by 나?꽃도둑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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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인민의 탄생

사회학자 송호근의 35년의 여정의 결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한국 사회를 재단해 온 ‘서양산 사회과학’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격동하는 한국 사회를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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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다.' 그동안 근대화의 여명을 연 추동력이 조선사회 내부에 있었는가 외부에 있었는가는 학자마다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에서 저자가 굳이 이 연구에 뛰어든 것은 직업적 소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문에서 사회학자는 한국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주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동안 토크빌의 민주주의론, 로크와 루소의 사회계약론, 베버의 사회 경제론과 방법론, 마르크스주의 발전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등의 서양산 사회이론으로는 한국사회를  설명해내기에는 한계점이 분명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있다. 서양 인식론으로는 성리학과 유교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한국사회를 설명하기란 심층은 들여다 보지도 못한 채 표층만 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그동안 범해 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근대의 기원을 찾는 연구들은 흔히 맹아론으로 식민지근대화를 넘어서려는 역사학자의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한 미시사적 연구나 목적론적 연구 방법이 근대 만들기를 가로지르는 공통된 시선임을 비판하면서 조선사회를 500년 동안이나 유지, 발전시켰던 동력의 구조, 즉 사회의 '거시적 구조'의 성쇠와 변질에서 근대의 여명을 찾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거시 구조의 전환' 인민은 근대 찾기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인민인가? 민중이니 하는 명사를 쓰지 않은 이유가 뭘까?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테제는 대한민국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인식부터 출발하고 있다. 노동계급, 부르주아지 없이 공론장을 만들어낸, 유교사회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나온 이들의 이름을 저자는 인민이라 부른다.

 

 

유럽에서는 인민이 신과 개별적으로 접속하는 길을 열어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근대의 출발로 보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근대는 어디서 부터일까? 저자는 조선시대로 돌아간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은 종교이자 정치이자 교육과 윤리였다. 지식이 곧 권력이었던 초기에는 통치의 객체이자 교화의 대상 즉 갓난아이 수준이었던 인민이 어떻게 행위하는 인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세종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된 언문을 익힌 문해인민의 등장과 함께 시작해 16~17세기에 걸쳐 문해인민은 투서, 벽서, 소설, 편지, 기록, 문학, 등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역사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를 향해 서서히 이동을 하였다고 한다. 인민의 탄생은 18세기 말에 등장한 천주교, 민란 동학농민전쟁, 서민 문예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곧 의사소통의 장으로, 하버머스가 말한 공론의 장이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국문담론은 지배층의 통치 축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창출했다. 저자는 이렇게 인민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구체적으로 조선의 근대를 언제로 보고 있나?

조선의 근대는 바로 19세기 초반 순조 연간에 지식-권력이 분리되던 세도정치 때라고 밝히고 있다. 중앙과 지방간의 인적교류와 학문적 교류가 단절되던 시기에 느닷없이 근대가 찾아든 이유가 뭘까? 세도가 내부에서만 학문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 변방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당시의 지배세력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지식사회라는 등식을 떠받친 공식이 와해되는 틈새로 종교, 문예, 정치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평민 담론장'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는 것이다. 인민과 역사의 접속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역사의 장이었던 것이다. 갓난아기 상태의 인민이 언문을 통해 겨우 말을 배워가며 옹알이를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찾아든 정신적 성숙과 함께 성장통을 겪은 셈이라고 해야할까?

 

 

그리하여 명사에서 동사로 이동한 주체로의 인민은 무수한 술어를 가지게 되었다. 인민으로서 ~되어가기는 시간의 경험과 공간적 배경이 있어야 완성되어지는 것이거늘, 자기의식 없이는 주체는 주체일 수 없다. 인민은 역사의 질료가 아닌 행위하는 자로서 개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주체성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근대의 추동력으로 인민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새로움이 있는걸까? 또한 심층을 분석해 보일 수 있는 연구에 대한 타당성을 과연 담보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다지 새로울 것도, 획기적인 연구방법론도 아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문해인민의 탄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근대를 연 것은 교양인이었다는 서양의 관점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문제의식이 거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저자 역시 서양산 사회과학의 프리즘에서(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다. 몰론 우매한 독자의 오독일 수 있다. 아니 해석의 오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인민의 탄생이 한국사회의 공론장의 구조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 출발이 문해인민과 유럽사회의 교양인이라는 사실은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 지난한 학문의 여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료와 자료집은 연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고, 조선시대 내부로 들어가서 인민의 탄생을 절차탁마하는 심정으로 끌어 올려놓은 점은 높이 살만 하기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인민은 거대 담론에 가려져 있거나 억눌려져 있던 개인의 발견과도 같은 것이라면 인민의 진화의 추동력은 뭘까?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동과 함께 라는 것이다. 저자는 문헌공동체, 자발적 결사체,새로운 인민의 탄생이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천주교는 국문 담론장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독서대중의 탄생은 주로 사대부 계층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던 문예 담론장을 이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근대의 여명을 여는 가장 중대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문예적 평민 담론장이야말로 그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보편어가 아닌 민족어의 발명, '주체의식의 리허설'을 가능하게 해준 문해인민이 근대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를 저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1) 왜 근대의 기원을 인민과 결부시키는가? (2) 인민을 결박시킨 조선의 통치체계는  어떤 것이었나? (3) 인민은 어떤 통로를 통해 그것에서 풀려났는가?

이 세가지 질문은 '인민과 근대', '조선의, 통치구조', 국문담론과 공론장'으로 개념화되는 과정을 400쪽이 넘는 지면을 할애해 풀어내고있다. 결론은 그야말로 앞서 분석해낸 것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외치던 학자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확실한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민족사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야말로 인간을 짓밟고 집안의 물건을 몽땅 수탈해가고 남긴 사다리를 보고 근대화의 징표로 보는 그 짓물나는 눈을 감겨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중도우파라 일컬어지는 송호근 교수의 견해에 대해 (가령 서문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명명한 점 등) 동의할 수 없거나 반박하고 싶은 건 잠시 밀쳐두기로 했다. 이 책에 집중하는 독자로 돌아가 이 연구집이 타당한 가를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제 인민에서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2권에서 계속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혀놓은 것에 일단 기대감은 있다. 부디 이 연구집이 무화한 몸짓으로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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