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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저녁을 굶은 달을 본적이 있다 - 우리가 찾아야 할 서정성이 담긴 책

by 나?꽃도둑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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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이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1월
평점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등단 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튼실하게 벼려온 시인의 연장은 건강하고 부드럽다. 돌에서 꽃으로, 그리고 길과 집으로 이어지는 기억과 응시, 상상은 서로 견고하게 얽혀 있다. 화려한 파격이나 손쉬운 초월에 기대...

www.aladin.co.kr

 

창비에서 2006년 새해 첫 시집이 나왔다. 우선 제목부터가 신선하다. 달이라는 사물에다 생명성을 부여해 그것도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고단한 행위자로서의 달이다.
그동안 수없이 지고 떠오르는 달을 보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한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인은 밥 먹 듯이 이력서를 쓰던 시절에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시절을 달에게 투사한 이승희 시편들은 전반적으로 서정성이 곱고 뛰어나다. 자기 목소리가 강한, 몰아 부치듯 다그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의 눈길과 목소리는 나긋하고 부드럽다. 순하디 순한 둥근 돌멩이를 손에 꼬옥 쥐고 있다가 살며시 손가락을 펴 보이듯 따뜻하고 순수하다.

시 제목에서 보듯 시인의 눈은 자연에 가 닿아 있다. 찔레꽃, 돌멩이, 감자, 패랭이, 수련, 풀, 달, 앵두나무, 산수유 등. 또한 작고 보잘것 없는 사물들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첨예하게 대립되거나 모호하거나 불손한 것들이 없다. 어떤 부당한 힘에 억눌려 있지 않은 '스스로 그러한' 것들 투성이다. 맹자의 '측은지심'을 이승희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고 만지고 교감을 나누고 위안을 얻은 사물들과의 관계는 시인의 삶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하지? 여기만 오면 고해성사하고 싶어져 논둑에
           앉아서, 그냥 똥 누는 자세로 앉아서 보면 살아 있는 죄
           낱낱이 고백하고 , 용서라는 말도 여기에서 듣고 싶어져.
            어떤 성자가 다녀가셨나? 얕은 물 속 물방울 같은 발자
           국들, 아 사람의 역사가 저리 아름다우니 내 눈물 보여도
           괜찮으리. 잘못 살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지 말고 논둑
           에 앉아 볼 일이다

                                                            - 「논둑에서 울다」전문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 「내가 바라보는」전문    

진작 스스로 그러하지 못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삶에 시비를 걸어오는 것들에 대항하고 견뎌내야 한다. 그 견디는 힘 중 하나가 기억 속에 지층을 이루며 내재된 정서가 아닐까 한다. 이승희 시의 서정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해설에서 유종호 시인은 '존재론적 결핍을 견디는 기억들'이라고 했다.
결핍, 얼마나 애틋한 말인가? 충만은 견디는 법을 모른다. 그저 넘칠 뿐이다. 그래서 외양을 향할 때 결핍은 안으로 안으로 구덩이를 파고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숨기기에 바쁘다.
시인은 그 구덩이에서 하나씩 건져 올린 기억과 정서로 마음에 새겨지는, 자국이 선명한 시들로 엮어 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누가 그들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침묵하고 있는 덩어리를 인식한다는 것! 시적 정서를 사물로 치환하는 능력을 가진 시인, 그 이름에 값하는 유순하고 정직한 언어로 직조된 시편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풀어진 마음과 몸이 물결 따라 흐르듯 유유히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물가 풀섶에 앉아 앉은뱅이 꽃들을 바라보며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게 웃고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목적은 아주 놀랄만한 사고로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혀지지 않는 순간으로 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값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한 밀란 쿤테라의 말과도 부합하는 정서적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멀리 있다
       
        오늘 아침 당신의 안부를 들었다
        물소리가 섞여
        반쯤은 젖어 있거나
        몇 개의 글씨가 파랗게 번져버린 편지
        당신은 왜 꼭 번져버린 그 글자마다에 들어 있는지
        여전히 난 당신을 읽어낼 수 없다
  
        때로 당신은
        물에 젖은 흰빛으로 내게 온다
        해질녘이었는지
        달빛이었는지 수면엔 온통
        흰빛의 무리로 연못 전체가 꽃 핀 듯 둥글어지고
        내 가슴팍에도 묵직하게
        물은 깊어지고, 깊어져서 한없어지고 나는 진흙 속에
        집 한 채를 짓는다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은 창문을 달고
        천창을 내어 환한 집
        내 손가락 사이마다 짓는 집

      파란 우체국 도장이 찍힌 엽서 한장 같은 물결의 무늬
 
                                - 〈수련2〉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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