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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간 책들...그리고 흔적

가족 기담 -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by 나?꽃도둑 2020.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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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가족 기담

자식을 생매장하는 부모와 부모의 간을 빼먹는 딸 등 불온하고 끔찍한 모습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옛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유광수 연세대 교수가 고소설과 현대소설, 우리 설화와 외국 옛이야기를 넘나들며 그 속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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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방학만 되면 동생과 함께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내려가곤 했다. 특히 농번기가 끝난 겨울에는 마땅히 할 일이 없던지라 할머니는 주전부리를 자꾸 만들어 주셨다. 따뜻한 방안에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정말 기나긴 겨울의 낮밤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우리가 누워서 딩굴거리다 못해 주리를 트는 걸 보시고는 심심하제? 그러시면서 할머니 어렸을 적에 동네에 떠돌던 이야기며 옛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푹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우리는 눈만 뜨면 얘기를 해달라고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졸랐다. 아마도 할머니는 아침이 오는 걸 두려워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속으로는 괜한 짓을 했구나 하고 후회하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명도 아닌 두명의 진드기가 이리가도 붙고 저리가도 붙었으니 얼마나 성가셨을까....상대를 보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어야 했는데 할머니는 손녀들이 그렇게까지 이야기에 집착하리라곤 상상도 못하셨으니... 할머니는 올해가 지나면 99세가 되신다. 가는 귀가 먹어 사오정이 되셨지만 워낙 유머가 있는 분인지라 아직도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정감이 묻어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랬듯 누구에게나  이야기는 무료한 일상에 재미와 감동과 오싹함을 제공해주는 오락적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옛이야기는 그렇게 할머니에 어머니 그 어머니에 어머니에서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실제의 이야기에 허구적 요소가 보태어져 다시 꾸며낸 이야기로 거듭 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민담이나 설화나 고전소설에서 적용되는 서사관습이라고 함은 이야기들이 논리적 개연성이 아닌 마술적이거나 혹은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모양새를 달리 해서 나타나긴 하지만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상징이나 메시지는 큰 틀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 역시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구비문학에서 걸러내고 걸러낸 이야기로 모습을 달리하고 나타났듯이 우리의 고전 역시 누구나 알고 있던 뻔한 이야기 이면에는 엄청난 비밀과 속내가 숨겨져 있었다. <가족기담>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파헤치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드러내놓고 말하기 두려운 현실을 이야기 속에다 꼭꼭 숨겨두고는 마치 그냥 단순한 이야기인냥 천연덕스러움을 가장하였지만, 은유와 풍자의 그림자는 속일 수 없는 법, 저자는 그 이면을 들추어 본다.

 

 

'장화홍련전'에서 계모와의 갈등 속에 있는 줄 알면서도 아버지인 배좌수가 과년한 딸인 장화를 왜 시집을 보내지 않았는지, 효자나 열녀라는 외피를 썼지만 실상은 잔인하고 위선적인 모습의 가족을 , 본처와 첩들의 관계에서 남자들의 이중적인 잣대와 행동들의 정당성의 뒤에는 포르노그래피의 욕망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첩들 사이에서도 눈물겨운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춘향이의 재발견이 흥미롭다. 신분상승을 위해 이몽룡을 향한 고도의 전략적 접근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데, 춘향은 자신을 잊지 않고 꼭 찾겠다고 약조한 불망기(不忘記)를 이몽룡으로부터 받아내는 당돌하고 발칙한 십대다.

 

 

<가족기담>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진짜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원본이나 이본을 중심으로 저자가 논리적 흐름을 좇아 추론하고 해석한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일정부분 흥미롭기도 하지만,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이라는 소제목이 주는 충격만큼 내용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카드를 집어들고 있는 듯한, 조금은 맥빠진 모습이다.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모순적 관계에 대한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건 고전을 지금의 가치관의 잣대로만 평가한 무리수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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