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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作 키스* 당신이 뚫고 나온 벽을 타고 황금빛 저녁놀이 흘러 내리고 있어요 당신은 내 목을 끌어안고 빰에 깊게 키스하지만 봐요, 내 발이 꽃밭 끝에 겨우 걸처져 있음을 꽃밭 아래는 온통 낭떠러지, 순하게 무릎 꺾어 당신께 드렸는데 이제 곧 밤이 닥칠 거예요 내 둥근 발꿈치가 어둠에 삼켜지고 내 입술은 점점 지워질 거예요 당신이 몰고온 꽃들도 시들어가고 있어요 저녁놀을 타고 온 반짝이는 별같이 당신이 나를 휘감았을 때 나는 발명되었어요 당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거에요 시든 꽃들과 몇 몇의 별만 반짝이기 전에 어서 내게 키스해줘요 우주 한가운데 느닷없이 솟아오른 꽃나무같이 화들짝, 생을 밝히고 싶어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2020. 9. 29.
[영화] 마를렌 이야기 “삶이 왜 그렇게 되었어?” 라는 질문에 마를렌은 “몰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야.” 라는 답을 한다. ‘어쩌다’ 는 매우 모호하고 불성실함을 함의하고 있지만. 삶의 구체적 표현이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삶은 ‘어쩌다’로 이루어진 추상성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추상성의 시간들이 바로 현재라는 시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기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마를렌은 감옥에 가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항상 술에 취해있지 않으면, 남자를 만나러 집을 비우고, 도둑질을 하고, 딸을 사기행각에 끌어들이는 비정한 엄마다. 그녀의 삶이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어쩌다 보니 여기 까지 왔네.” 라고 마를렌은 말하지만 그녀의 삶은 이해받을 수 없을 정도로 추악.. 2020. 9. 28.
지하철 에피소드 2 1 아기 울음소리가 지하철 안을 가득 메웠다. 태어난 지 몇 달이나 되었을까? 포대기 안에서 두 주먹을 쥐고 팔 다리를 뻗대며 울어댔다.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엄마는 아기를 달래려고 연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자리를 양보했다. 그런데 엄마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기는 더욱 악을 써대며 울어댔다. 아기의 엄마는 얼른 일어나 아기를 달래느라 애를 쓰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기와 엄마의 소통의 부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역에서 바로 내렸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래. 내리자... 내리자.......” 아기는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울음을 딱 그쳐버렸다. 2 “노란 머리에 파란 눈 아가씨들 너무 떠드는 거 아니요? 거 조용히 좀 하시오, 동방예의지국에 와서....어험.” 아저씨는 대뜸 외국인 두 .. 2020. 9. 27.
지하철 에피소드 1 1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앞 전동 칸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거의 튕겨져 오르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는 문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영문인지 누구에겐가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쩌릿한 느낌과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빨리 문 열어요”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시선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로 들락거렸다. 누군가가 문을 열던 그때 전동차가 정거장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 승객의 휴대폰 배터리가 폭발하여 소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해져 잠시 혼란이 있었으니 이제 안심하여도 좋다는 .. 2020. 9. 26.
마그리트의 <보상받은 시인>그림 읽기 그림을 보면서 무릎을 딱 쳤다. 그림에 기가막히게 떨어지는 문장이 생각났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마음속에 꽃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 법륜 스님의 말씀이다.의 마음속에 붉은 노을이 가득 들어 있다.본다는 것은 관심이 없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는 법,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이미 내 마음속에 꽃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소리다.나는 이러한 문장을 좋아한다.구구절절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보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면 충분한.이러한 문장은 통찰 없이는 쓸 수 없다. 행복하다...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도 이 그림에 맞는 문장을 만난 것도... 2020. 9. 25.
시 한편 읽고 가실게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ㅡ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2004) ----------------------.. 2020. 9. 24.
[책] 다녀왔습니다 윤주희의 자서전 《다녀왔습니다⟫를 읽다가 불현 듯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 네덜란드로 입양을 가야했던 그녀와 달리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2년을 할머니 집에서 살아야 했다. 처음 얼마 간은 매일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떼를 쓰고 울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떼어놓고 갔을 때 느꼈던 감정은 공포와 불안감이었다. 그나마 나를 예뻐해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에겐 있었지만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금발머리의 서양인이 부모라고 나타났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을까 싶다. 아이는 부모와의 애착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인데 친부모와의 단절은 극심한 공포를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입양 갈 때 입었던 원피스를 잠잘 때도 벗지 않았다고 하니.... 끝내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여겼고 또 다시 버림받.. 2020. 9. 23.
글쓰기의 지도 서점에 가보면 글쓰기에 관한 책을 별도의 진열장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많다. 글쓰기에 관한 고민을 깨끗이 해결해 줄 것처럼 광고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뼛속 깊이 내려가 글을 쓰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책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글을 잘 쓰고자 하는 사람들, 즉 수요자들이 책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도대체 글을 잘 쓰고자 하는 열망은 왜 생기는 것일까? 비근한 예로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문화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은 소통의 장으로 글쓰기를 필요로 하며,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글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인터넷 작가를 배출하기도 하고, 인터넷에 올린 글이 영화로 제작되거나 책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2020. 9. 22.
해운대 노을 나는 일출보다 일몰을 더 좋아한다. 특히 분홍빛 하늘에 환장한다. 퇴근 길에 기가막힌 해질녘 광경을 보게 되었다. 차가 막히는 외곽도로를 피해 달맞이 길로 들어섰는데 푸른빛과 분홍빛이 한데 어우러진 하늘이라니! 숨 막히도록 황홀했다. 차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황홀하다. 해질녘 노을은 해가 넘어가기전 짧은 시간 동안 하늘을 물들이곤 하는데 매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프랑스에선 해질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 해질녘은 붉그스름하게 물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완전히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상태로 매우 아름답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곳에서 나의 시간도 멈춘다. .. 2020. 9. 21.